<데스크라인>준비된 자의 승리

양승욱 생활전자부장 swyang@etnews.co.kr

최근 우리나라 가전시장에 일본 업체들의 직접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AV전문업체인 JVC와 카메라전문업체인 올림퍼스가 이달 초 한국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지난 90년 소니가 현지법인을 세운 이래 만 10년 만의 일이다. 또 오디오 전문업체인 아이와는 이른 시일내에 현재 연락사무소를 현지법인으로 전환할 것으로 알려졌다. 샤프는 지난해 한국샤프의 지분 50%를 인수하는 것으로 한국 사업의 뿌리를 내렸다.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세계적인 명성을 확보하고 있는 마쓰시타전기가 내년 4월 100% 자본을 투자한 한국 현지법인을 설립키로 했으며 산요, 히타치, 온쿄 등도 한국법인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가전업체들의 이같은 움직임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7월 수입선다변화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일본업체들의 한국 진출은 너무도 당연시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업체들이 한국에 진출하는 모습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간 5조원에 달하는 적지 않은 시장. 그리고 거의 맹목적이라고 생각들 정도로 일본브랜드를 좇는 일부 한국인들의 구매행태. 일본 국내 수준의 저렴한 물류비용. 이같은 상황에서 비추어보면 한국의 가전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전세계 가전시장을 평정한 일본업체들에는 「식은 죽먹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지난 20년동안 수입선다변화제도라는 다소 억지성의 제도를 만들어 일본산 가전제품의 국내 유입을 막아보려 했던 우리 정부의 고충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 가전유통시장의 빗장이 활짝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업체들의 공세가 1년여가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국내 가전업계에서는 LG·삼성·대우로 대표되는 매머드급 로컬기업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고 유통이 이들 가전메이커에 의해 수직적으로 종속돼 있으며 애프터서비스부문에서도 로컬기업에 비해 취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설명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 일본 가전업계가 한국시장을 공략하는 데 모범답안으로 삼고 있는 소니코리아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와는 다른, 그러나 오히려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찾을 수 있다. 소니코리아 임직원들은 소니코리아가 자신들의 모습 이상으로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비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 로컬기업인 삼성이나 LG와 같은 수준에서 비교되는 것을 정중히 사양한다. 이미 세계적인 가전업체로 올라 선 한국의 기업들과 한국시장에서는 결코 경쟁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니코리아 외에 일본의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수입상들도 삼일절, 광복절 등에는 광고를 게재하지 않는다. 괜히 한국의 소비자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다.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이후 일본 가전업체들의 대대적인 공세가 곧바로 이어졌다면 지금과 같이 한국시장에서 일본산 제품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겠는가』라는 한 수입상의 이야기가 국내 가전업계 관계자들 이야기보다 더욱 설득력있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산 오디오가 한국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올 하반기에 어느 새 40%에 육박하고 디지털캠코더 같은 경우는 80%를 훨씬 웃돌며 소니코리아의 매출이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이후 매출이 그 이전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는 사실은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일본 가전업체들이 최근 하나둘씩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한국에 현지법인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난 1년여 동안의 치밀한 시장조사 결과 한국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일본 업체들의 공세는 과거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할 것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직후 자신감을 내보였던 국내 가전업계 관계자들도 이제 하나둘씩 세워지는 일본 가전업체들의 현지법인들을 쳐다보며 우려감마저 내보이고 있다.

더구나 한일간 숙명적인 상황을 슬기롭게 타개해 가면서 한발 한발 한국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일본 가전업체들에 국내 유통상황은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유통구조가 대리점에서 양판점,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일본문화 개방으로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반일감정 또한 급격히 수그러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수입선다변화제도라는 틀 속에서 우리 기업들이 키워왔던 경쟁력이 1년 만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지금, 앞으로 더욱 거세질 일본 업체들의 공세를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버텨나갈지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