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구조조정도 구조조정 나름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달력이 두장밖에 남지 않았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의 출발점인 2000년도 어느새 다 지나갔다. 희망에 부풀어 출발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다.

희망적인 사람은 아직도 두장이나 남아 있다고 이야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빠른 속도로 우리 경제가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우울한 이야기만 들리고 있다.

반도체 가격은 연일 떨어지고 있다. 1년 6개월간 지속된 반도체 경기호황은 끝난 형국이다.

지난 9월부터 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든 이래로 지난달말 현재 북미 현물시장에서 64MD램은 4.27∼4.53달러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도체 업계의 수익을 좌우하는 D램 고정거래선 가격마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반도체 업체들의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가격의 폭락세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더 이상 장밋빛이 아니라는 우려감을 던져주고 있다. 심지어 반도체 가격의 하락으로 나타난 96년의 「반도체 쇼크」가 재현될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IMF를 극복한 일등공신인 벤처기업들의 상황은 더욱 참담하다. 벤처거품론으로 촉발된 위기론이 수그러들만 하면 악재들이 터져나오면서 벤처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최근 두달간 창투사들의 신규투자조합 결성이 이전에 비해 70% 이상 감소했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신규 결성된 조합은 17개. 상반기 한달평균 신규 조합수가 12개인 점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많이 줄어든 수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현준게이트 사건은 코스닥시장의 침체로 어려워진 자금유입을 막아버리고 있다.

투자 담당자들은 『투자하기가 두렵다』면서 『이전에 10개 업체 중 3∼4개 업체에 투자했다면 지금은 10개 중 1개 업체를 고를까 말까 한다』고 말한다.

벤처기업 앞에 생존게임만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두 기둥이었던 반도체 가격하락과 벤처기업 침체로 체감경기가 나빠지고 있다.

언론사에서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서민의 70% 이상이 살아가기 어렵다고 응답하고 있는 것도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체감경기에 이어 실물 경기지표도 별로 좋지 않다. 통계청이 발표한 9월중 산업활동 동향에 따르면 생산은 지난 8월에 비해 4.3% 줄었고 전년동기에 비해 15.1% 느는 데 그쳤다.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80% 밑으로 뚝 떨어졌다.

소비위축은 더욱 두드러지고 설비투자증가율도 낮아지고 있다. 경제관련 전문가들은 경기가 정점을 지나 하강국면에 접어들지 않나 우려할 정도다.

더구나 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내년도 경기전망도 별로 좋지 않다. 경제연구소들은 내년 우리나라 경제는 올해 경제성장률에 크게 못미친 5∼6%대의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쁜 이야기도 들린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유가가 높은 증가세를 지속하면 성장률은 4.2%대로 급락하고 물가상승률은 5%대까지 치솟아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된다』는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재벌기업이나 벤처업체나 할 것 없이 몸을 사리고 있다. 재벌총수들은 긴축경영을 맨 먼저 들고 나왔다. 불필요한 지출은 줄이고 적자사업이나 한계사업은 철수한다는 경영방침을 정했다.

당연히 투자도 줄인다고 한다. 일부 핵심사업을 빼놓고는 신규사업을 동결하기로 했다.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지금 현실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구조조정에 착수한 기업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또다시 임직원들의 감원을 들먹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기업에서는 연말 임원인사를 앞두고 상당히 많은 수의 임원이 자리를 떠날 것이라는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흘러다니고 있다. 벌써 누구 누구는 자리보전이 힘들 것이라는 살생부마저 나돌고 있다.

IMF를 견뎌온 임직원의 입장에서 이번에 불어온 찬바람은 더욱 춥다. 조직분위기가 꽁꽁 얼어붙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우리는 IMF시절에 벌인 구조조정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감원을 통해 단기적으로 효과를 거뒀을지 모르나 불과 2년도 안돼 또다시 제2의 IMF라는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한 셈이다.

일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이코노미스트에서 『한국내에서 통하는 기업은 많지만 핀란드의 노키아나 스웨덴의 에릭슨처럼 세계적인 기업은 없다』고 지적했다.

뼈아픈 이 지적이 아니더라도 IMF 구조조정은 기업경쟁력 향상에 아무런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번 구조조정만큼은 IMF때와 같은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구조조정이 단순히 임직원을 춥게 만드는 구조조정이어서는 안된다.

미래를 담보한 신사업이나 제품경쟁력이 뒤따라 주어야 한다. 기업경쟁력 향상과 연결될 수 있는 그런 구조조정이어야 한다.

신규 사업이나 신상품을 발굴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틈새시장을 찾아 세계무대로 나서야 한다.

어떻게 보면 동면에 빠진 개구리처럼 움츠러들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지금처럼 단순히 감원과 같은 구조조정에 더이상 얽매여서는 우리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