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자연인 정문술(노 벤처인의 퇴진을 바라보며)

기자가 정문술씨를 안 것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현역 기자 중에 그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몇 안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 때문인지 지난주 결행한 그의 퇴진은 남다른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정씨의 퇴진을 보면서 느꼈던 일차적인 감정은 당연히 청량감 그 자체였다. 모처럼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적확하게 사용된 한편의 장면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동안 정치인과 재벌을 비롯한 「가진 자들의 식언」에 워낙 질려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정씨만큼 드라마틱한 이력을 가진 이도 흔치 않다. 중앙정보부 출신의 늦깎이 창업, 자살 결심, 1세대 벤처 대부에 오르기까지 그의 사업여정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일을 누구보다 한발 먼저 벌이고 즐겼던 그다. 그렇기에 창업에서부터 영욕을 같이 해온 무대(회사)를 내려오는 결정을 하기란 더욱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치러야 했던 인간적인 고뇌를 생각하니 많은 일들이 머리속을 스쳐간다.

기억 하나. 그를 처음 만난 90년대 초반은 미래산업이 반도체 검사장비인 핸들러로 시장에서 명함을 내밀 무렵이었다. 당시 정 사장은 「정직한 경영」으로 돈을 번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물론 그때는 그냥 하는 얘기로 들었다.

불과 1년 전에 젊은 인터넷 CEO들을 자주 만났다. 그러나 풍부한 펀딩 자금을 자랑하는 그들에게서 정작 정직하게 돈벌겠다는 소리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비즈니스 관행이 투명성에 기초를 두는 데도 말이다. 당시에는 그들이 아마추어처럼 보이기 싫어서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모럴해저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기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기억 둘. 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된다. 천안공장을 신축하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작업장을 종업원들이 근무하기 가장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자 했던 평소의 꿈을 이뤘다는 표정이다. 공장 한켠에 대나무숲이 울창한 휴식공간까지 마련했다며 지은 함박웃음은 어린아이 그 자체였다.

부를 세습하지 않겠다는 말을 처음 꺼낸 것도 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천안공장 식당에서 상추쌈을 먹으며 마치 큰 비밀이라도 얘기하듯 귓속말을 했다. 어제는 부의 세습의 원인이 되는 일가친척 경영참여 불가 방침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노라고. 그리고 예의 특유의 어린아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를 알 만큼 알 정도의 시기였지만 역시 또 그러려니했다. 우스개 소리지만 원래 유산이 없는 사람들이 부의 세습 불가운동에 가장 적극적이다. 유산 안물려주기 운동을 펼치는 분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인간사가 그렇다는 얘기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세습은 곧잘 땀을 흘리게 만드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자식에게는 고생을 안시키겠다는 한 아비의 소박한 기쁨이 일의 원동력이 된다는 얘기다. 더욱이 성직까지 세습하는 요즘 땀흘려 일해 돈을 번 이들에게 그 기쁨을 포기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나라 경영환경에선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소유와 경영분리 해법을 실천으로 보여줬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는 디지털 경제에 맞는 기부문화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고 공언한다. 돈을 버는 법과 쓰는 법 모두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욕심(?)이다. 그답다.

지난해 말 「이제는 정말 그만하겠다」는 말을 유난히 자주 했다. 하지만 기자는 큰 마음을 두지 않았다. 워낙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다. 실제로 미래는 반도체 장비에 이어 인터넷·첨단무선단말기 사업을 한창 진행중이다. 미래에서 차지하는 그의 카리스마를 감안할 때 어려운 시기의 사령탑 교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때문에 은퇴는 커녕 엉뚱하게 정치나 하지 말라고 퇴박까지 주었다. 물욕 다음의 인간욕구가 명예욕이라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젊은 기자의 퇴박에 허허롭게 웃던 그는 『어차피 떠날 것, 후임이 가장 부담없이 일하기 좋은 시기에 가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기자는 결국 큰 낙종을 한 셈이다.

정문술씨는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퇴진이 세습문화가 판치는 대기업에까지 당장 영향을 줄것으로 기대하진 않는다. 또 정직경영을 아직도 우습게 아는 젊은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경종을 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우고 볼 것 없었던 우리의 기업문화에 그는 분명 큰획을 그었다. 그 다음은 남은 사람들이 선택할 몫이다.

이제 평범한 초로의 자격으로 청계산을 오를 정문술씨에게 오랜 친구로서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학창시절 주절거렸던 싯구를 오랜만에 생각나게 해준 보답이다.

<김경묵 인터넷부장 km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