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걱정스런 통상환경

윤원창 부국장대우 경제과학부장 wcyoon@etnews.co.kr

미국의 통상정책을 이끌어 갈 로버트 죌릭 무역대표부(USTR) 대표지명자의 인사청문회 발언이 국내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최근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현대전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구제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보조금 규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위반하지 않도록 강력한 압력을 가하겠다』고 거침없이 답변했다 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가당치 않다. 현대전자 회사채 인수조치는 자금시장 안정화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WTO 규정을 원용하기엔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한 통상정책을 이끌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첫 공개 발언이 자극적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특정기업과 정부정책을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WTO 규정까지 들먹인 점이 예사롭지 않다. 미 상무부가 작년 초 우리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WTO 규범의 문맥에서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점을 감안하면 미국은 통상정책과 교역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어떤 것이든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듯한 태도가 분명하다.

죌릭 대표의 발언으로 정부나 무역관련 기관들은 향후 드세어질 미국의 통상압력에 새삼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통상관련 부처 담당자의 성향 분석과 함께 대한 통상정책 전망 관련 자료를 잇따라 내놓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전자업계도 마치 「대미 통상 경계령」을 내린 듯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 파악과 함께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물론 우리가 이같은 미국의 대한통상정책 강화를 미리 예상치 못한 바도 아니다. 작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부터 예측했던 상황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지지기반이던 정보통신산업의 육성에 역점을 뒀듯이 부시가 당선될 경우 지지기반인 전통적인 제조업체의 육성에 전력하고 이들 제조업체의 요구가 통상정책에서 반영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했다.

미국 통상정책의 변수인 미국경제는 작년말부터 하강국면에서 진입했고 무역적자가 4000억달러를 넘어선 상황이다. 때문에 이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부시 행정부가 집권초기 단기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어 통상정책 변화 예측은 가능하다. 12년전 미국이 불공정거래로 무역 흑자를 내는 나라를 골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하고 무자비한 보복을 취한다는 이른바 공포의 슈퍼301조를 내놓은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미국 USTR 대표지명자 발언에 마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양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우리의 통상정책이 교역상대국 체제 또는 정권의 변화에 대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 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중국과의 마늘분쟁에서 우리 정부의 임기응변식 통상정책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경험이 있는데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외국과의 통상마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단기처방을 강구할 때는 양자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는 상황에선 협상능력이 뒤떨어져질 수밖에 없다.

죌릭 지명자의 발언에서 보았듯이 교역상대국의 통상관련 부처 담당자가 보수적이니 진보적이니, 혹은 자유무역주의자니 보호무역주의자니 하는 것은 이제 냉엄한 국제통상의 무대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배경과 개인적인 신념을 가진 상대가 우리의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게 되든 분명한 것은 자국 기업과 국익만이 그의 최대 관심사이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경제현실을 돌아보고 최선으로 국익을 증진할 수 있는 통상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사실 우리나라는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4대 개혁작업에만 매달려 왔다. 반면 중요한 대외 경제여건 가운데 하나인 무역 통상정책에 대해선 소홀히 취급해 왔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표적인 예가 작년 12월 중순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로 내정, 발표된 지 두달이 지나도록 후임자가 결정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통상교섭은 「총성없는 전쟁」에 비유된다. 곧 눈앞에 벌어질 전쟁에 나설 사령관이 없는 상황에서 『아무 걱정할 것 없다』는 당국자들의 말에는 아직도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달콤한 밀월감에 도취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가 별로 능숙하지도 못하게 대미 정치외교에 매달려 오는 동안 세계는 너무 변했다. 국경이 많이 허물어진 것 같지만 국익보호에는 냉혹하다. 국가간 우호란 것도 이해의 궤적이 같을 때만 통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