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기업 경영의 레임덕

양승욱 생활전자부장 swyang@etnews.co.kr

매년 이맘때 쯤이면 연일 지면을 장식했던 주요 그룹들의 인사 관련 뉴스가 요즘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해까지 그룹 계열사의 사장단 인사는 연말이나 연초에 이루어지고 새로 구성된 사장단이 각 사별 조직개편 및 임원인사를 단행해왔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모든 조직개편 및 인사가 마무리돼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야 하지만 올해는 그렇지 못하다. 연말·연초의 인사관행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기업경영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 삼성그룹은 정기주주총회 이전에 그룹 차원에서 일괄 발표되던 종전의 관행과 달리 올해는 계열사별로 주총날 발표할 예정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따라서 삼성그룹의 사장단 인사는 다음달 초나 윤곽이 드러날 것이며 계열사별 인사 및 조직개편도 그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LG그룹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3월 초부터 중순에 걸쳐 계열사별로 열리는 주총에 맞춰 사장단 및 임원인사를 실시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관련법에 규정된 대로 주주총회의 의결을 거쳐 등기이사를 선임한 뒤 곧바로 이사회를 열어 대표이사를 뽑기 때문에 인사가 자연스럽게 주총 이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 그룹의 설명이다. 현행 상법에는 대표이사의 경우 주총에서 선임된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뽑도록 돼있으며 다만 정관에 특별규정이 있을 때는 주총에서 직접 뽑을 수 있게 돼있다.

주총은 주식회사의 최고 의결기구다. 그러나 과거 적지 않은 대기업들이 주총을 열기도 전에 이미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임원인사를 단행해왔다. 임원 개선이 주총의 의결사항인데도 불구하고 기업의 주인인 주주는 배제되고 그룹총수의 사견에 의해 인사가 좌우돼왔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기업의 투명경영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단체들이 이같은 기업의 인사관행에 반발하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주요 그룹의 인사가 주총 이후로 미뤄지고 있는 것은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투명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성과 LG 등 주요 그룹의 이같은 움직임은 국내 기업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사관행을 정착시킬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인사와 조직개편을 정기주총 이후로 미루는 것이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투명경영을 위한 노력이라고 하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1·4분기가 지나가도록 올 사업계획이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사장단이나 임원진 모두 인사문제에 얽매여 제대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올해 대부분의 기업들은 임원직급의 단계를 줄이고 있다.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지만 당사자인 임원 대부분은 임원수를 축소하기 위한 수단임을 알고 있다. 언제 보직이 바뀌거나 아니면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손이 일에 잡힐 리 없다. 『조직이 모두 붕 떠있다』는 한 임원의 토로처럼 말 그대로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한해 사업이 마무리되는 지난 연말부터 장장 3개월 동안 기업활동에 공백이 생기는 이른바 레임덕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신년 초에는 각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계획에 따라 협력업체들과 부품공급 및 공급단가 계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기업활동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올해는 협력업체 대표들과 간담회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실무자들은 하소연한다. 이에 따라 중소 협력업체들 역시 올해 생산물품과 공급규모를 결정짓지 못해 신규 시설투자를 미루고 있다. 한 기업뿐 아니라 경제 전반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부 기업들이 임원인사를 내부적으로 미리 단행했지만 발표를 주총 이후로 미루는 등의 편법을 동원하는 것에 대해 무조건 비난할 수 없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목표가 「옳다」고 하더라도 실행과정에서 부작용이 크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게 당연하다. 시민단체들이 과거 인사관행에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과거 총수들의 잘못된 인사관행을 바로잡아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있다. 경영의 투명성도 기업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인사가 늦어져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면 이 또한 잘못이다.

실질적으로 기업활동에 책임지는 등기임원을 제외한 나머지 실행임원들에 대한 인사에 대해서는 먼저 처리가 이루어지든 아니면 경영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연초에 임원인사를 단행하고 문제가 되는 임원에 대해서는 주총에서 책임을 묻는 고위공직자의 청문회와 같은 새로운 인사관행이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