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급격한 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아 생활조건의 불안정과 긴장이 심해지고 있다. 토머스 울프는 탕아의 귀가에서 주인공 유진 갠트의 입을 빌려 뿌리뽑힌 사람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이렇게 읊었다.

「무엇하러 집으로 돌아왔냐? 넌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최근 집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독일의 서정시인 마리아 릴케가 노래한 것처럼 「창으로부터 미지의 황량한 도시의 어둡고 인적없는 거리를 내다보는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한 경기불황과 기업들의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생계의 터전을 잃어버린 실업자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형편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1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실업자수는 98만2000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에 비해 한달새 8만9000명이 증가한 수치다. 실업자가 100만명에 가까워진 것은 지난 2000년 3월이후 10개월 만의 일이란다. 1월중 실업률도 4.6%로 지난해 12월보다 0.5% 높아졌다.

아직도 4.6%는 그렇게 높지 않을 수 있다. 계절적인 요인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이라 건설쪽 일자리가 줄어든데다 방학중 대학 재학생의 구직활동이 늘어난 탓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전통적으로 선진국의 실업률과 다르다고 한다. 취업구조나 고용관행이 다르기 때문이다.

농림어업부문 취업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데다 무급가족종사자가 많아 우리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선진국에 비해 낮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실업률이 조금만 높아져도 실제 체감으로 느끼는 고통은 선진국에 비해 우리가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더구나 문제는 실업에 대한 복지정책이 완비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터에서 밀려나면 당장 생존이 걱정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물론 정부도 실업의 증가를 가볍게 보지 않고 다양한 실업대책을 내놓고 있기도 한다. 정부는 청년층 실업자를 줄이기 위해 고용보험기금 중 직업능력개발사업용으로 배정한 4000억원을 활용, 정보기술 관련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40∼50대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해 재취업훈련과 취업훈련 보조금 총액을 늘릴 방침이다. 6월에 폐지되는 채용장려금을 대신해 채취직장려금을 신설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부가 실업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미봉책에 그칠 뿐이다. 이런 정책들은 근본적으로 실업자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미흡하다. 최소한의 교육 및 의료혜택을 보장받는 기본적인 생존프로그램이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1차적으로 고용을 책임져야 하는 기업들의 도덕적 책임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선진국처럼 고용의 유연성을 들먹이기에 앞서 우리는 기업들에 고용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종사자들도 이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들먹이면서 사람을 자르는 단순한 일을 먼저 하고 있다. 인력을 조정하는 게 가장 빠른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업경영자들은 이를 선호한다. 일본 닛산자동차를 접수한 프랑스 르노의 경영진이 가장 먼저 한 일도 사람을 자르는 일이었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 사람을 자르지 않고도 오히려 효과적으로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도 있다. 브라운관 유리벌브를 생산하는 한국전기초자가 그런 업체다.

한국전기초자는 지난해 영업이익률 35%, 부채비율 30%대의 초우량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 5700억원에 당기순이익 1700억원을 기록한 이 회사의 직원 1인당 매출액 4억5000만원, 순익 1억원 이상을 내고 있다.

지난 97년 이 회사는 77일이라는 장기파업으로 인해 59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부실덩어리였다. 차입금이 3500억원에 육박, 1114%라는 살인적인 부채비율에 허덕인 업체였다. 당시 이 회사의 경영진단을 맡았던 미국 컨설팅 기관인 부즈앤드해밀턴사라는 업체는 한국전기초자를 살려두기보다는 청산하는 게 좋다고 권고할 정도였다.

이런 회사를 맡은 서두칠 사장은 불과 3년 만에 인력감축이라는 구조조정 대신 임직원의 마음을 붙잡은 열린 경영으로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서두칠 사장은 『심(心), 정(情), 기(氣). 직원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북돋워주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한국식 구조조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회사는 기업구조조정이 반드시 인력을 감원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우리 기업들은 실업을 유발시킨 구조조정보다는 고용안정에 신경을 더 쓰면서 합리적인 인사조직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