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국가 CIO가 필요하다

◆김경묵 디지털경제부장 kmkim@etnews.co.kr

무려 12명의 장관급 인사가 경질되는 대규모의 개각이 발표됐다.이번 개각의 규모를 볼 때 일단 정부의 바람대로 분위기 일신에는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반드시 그런것 같지만은 않다. IT가 국가경쟁력을 좌지우지하는 최근의 경제환경을 감안할 때 이번 개각에 국가 CIO신설 부분이 빠져있다는 점은 너무 아쉬운 대목이다.

국가 CIO얘기는 벌써 수년전부터 공론화돼온 화두다. 그러나 요즘처럼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다. 부처간 이기주의 현상은 물론 국가 IT전략 부재로 우려되는 나라 전체의 경쟁력 약화 조짐 등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는 판단 때문이다.

「부처간 이기주의」는 정부관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공무원이면 백이면 백, 이 말은 실상을 모르는 무책임한 말이라고 강변한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산업계를 위해 밤잠을 설치며 만든 정책을 이런 말로 폄하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사실 정책의 수혜대상인 업체 입장에서 봐도 지원주체가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야말로 흑묘백묘식이다.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제도적 지원은 물론 돈도 많이 주면 금상첨화다.

「부처간 이기주의」는 이처럼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 무엇보다 공무원 특유의 복지부동이 아닌 일을 해보겠다는 「의지의 오버」에서 나온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제는 현실에서 나타난 결과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먼저 지적되는 것이 정책의 중복성으로 인한 혈세의 낭비다. 요즘 IT 4대 신기술이나 디지털 콘텐츠를 놓고 벌이는 정통·산자·문화부의 주도권경쟁은 개념 정의에서부터 지원 방법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국면이다. 이뿐 아니다. 크게는 벤처 육성정책과 전자상거래지원책에서부터 작게는 여성IT벤처협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안을 놓고 벌이는 부처간 비효율적인 중복 경쟁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부처간 주도권경쟁이 결국 업체에 줄서기를 요구한다는 것도 그냥 넘기기 어려운 문제다. (강요든 알아서 기든)실제로 지난해 열풍을 몰고 온 인터넷 관련 한 협회에서는 소속을 산자부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정보통신부로 할 것인지를 놓고 회원간 투표를 하는 진통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지금도 많은 벤처 CEO들은 산자·정통·문화·과기 부처의 눈치를 보느라 상당부분의 전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토로다.

분명 경쟁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효율성보다는 산업(업계) 장악을 위한 선심성 내지 구호성 정책으로 상호간 불필요한 낭비요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점만 보완된다면 부처간 정책싸움은 공무원들의 능력배양을 위한 좋은 장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부처간 의욕을 조율하고 이를 시너지화해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기관이나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옛날처럼 낮잠만 자는 공무원이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 CIO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가IT정책을 거시적으로 수립하고 이를 조율하는 기구가 있다면 부처간 이기주의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명제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이제까지 기관이나 기구가 없어서 못했느냐는 반문을 할 법하다. 또 다른 옥상옥이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같은 지엽적인 문제에 귀기울일 때가 아니다. 더 이상 IT산업은 일개 산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IT는 이제 전통산업 활성화를 위한 핵심엔진이다.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는 IT백년대계를 세운 국가만이 궁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빠르게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중이다. 80년대 하늘을 찔렀던 일본의 콧대가 IT전략의 부재로 90년대말 미국 실리콘밸리에 역전 당한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또 오비이락격이지만 미국의 최대 호황기였던 클린턴 정권때 국가 CIO역할을 했던 앨 고어의 낙선이후 미국 경제의 퇴조가 시작됐다는 점도 분명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정보화의 붐을 타고 시장파이는 엄청나게 키워놨지만 결국 파이를 맛있게 먹은 것은 외국 IT업체였다. 유선인터넷강국을 외쳤지만 정작 본무대인 무선인터넷시장에서 일본을 제치고 제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국가차원의 IT전략 부재가 단순히 IT산업의 퇴조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단선적인 사고는 그래서 위험하다.

청와대내 IT수석형태의 국가 CIO의 신설이 현 시점에서 시급한 것은 바로 부처간 정책조율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담보하는 큰 그림을 위해서다. IT강국이 되지 않고는 무한 경쟁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국가 CIO는 이제 왜 필요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신설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