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역사의 교훈

◆김경묵 디지털경제부장 kmkim@etnews.co.kr

 온통 나라가 테러와 전쟁얘기뿐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테러를 당한 것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이토록 진이 빠지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워낙 가진 것이 없는 우리의 업보다. 시장과 자원이 없는 우리로서는 외부환경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전쟁과 같은 격변은 당장 우리의 목줄인 수출전선의 침체는 물론 원자재구득난을 가져와 생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경제테러와 다름아닌 꼴이다. 사실 이런 격변일수록 좀더 냉정한 통찰력을 확보해야 한다. 사건의 이면까지 꿰뚫는 정확한 대안만이 우리의 생존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사공부는 가끔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사이래 종교 전쟁만큼 잔인한 전쟁은 없었다.이슬람 토벌에 나선 십자군전쟁이 그랬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내 신교와 구교간 전쟁에서도 유례없는 살육이 저질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목이 잘려나간 시체가 다반사일 정도로 그 살상의 잔인함이 영토분쟁과 민족분쟁으로 야기되는 일반적인 전쟁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사랑과 용서로 대변되는 종교간 전쟁이 그토록 잔인했다는 사실은 분명 아이러니다. 그 해답은 요즘 유행하는 성전(聖戰)이란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나(국가)를 대적하는 이는 단순히 나를 반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거역하는 것인 만큼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신의 대리자로 신의 뜻에 따라 상대를 죽이는 것인 만큼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역사가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이같은 아이러니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는 함정도 많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승자의 기록이다. 따라서 한면만 강조해 자칫 잘못 이해할 경우 진실을 외면하게 된다. 아메리카 정착민과 인디언의 관계가 그렇고 베트남전쟁도 보기에 따라선 전쟁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사실보다는 해석이나 시각으로 역사를 이해한 역사학자 E H 카의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도 이같은 잣대로 보면 흥미롭다. 흔히들 이데올로기나 영토분쟁 등의 ‘거룩한’ 이유를 들어 발발하는 전쟁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명분과는 다른 경우가 흔하다. 이보다는 오히려 통치권자의 안위가 문제될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전쟁은 국민의 눈을 외부로 돌려 내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종종 사용된다.

 무엇보다 역사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주는 교훈 때문이다. 역사는 결과만 중시하고 그래서 승자의 논리가 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인과가 있기 마련이다. 또 이를 되집어볼 경우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곤 한다. 이번 테러사건도 마찬가지다. 주변국에 대한 미국의 행동과 테러동기는 분명 불가분관계를 맺고 있다.

 현재의 미국을 지탱해주는 힘, 즉 지금의 미국됨은 약소국들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심하게 말하면 중진국, 약소국, 개도국 등의 희생 위에 미국은 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은 정권이 바뀌면서 독립주의를 외치며 자신들의 기반인 주변국가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자기 발등을 찍는 격이다. 결과론이지만 매우 어리석었다는 반성이 미국 내부에서도 강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몰라도 미국의 자리에 우리나라 대기업이 자꾸 오버랩된다. 자신들의 기반인 중소기업을 도외시하는 행태가 미국의 그것과 비슷해서인 것 같다. 네트워크경제의 핵인 협업이 중시되는 디지털시대에도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일방통행이다. 결제관행이나 영업관행 모두 오프라인시대의 거래폐단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요즘 성행하는 공급망관리(SCM)만 봐도 그렇다. 흔히들 SCM 하면 대기업과 협력 중소기업 모두가 공존공생할 수 있는 ‘윈윈전략’으로 여겼지만 정작 대기업의 생산환경만 호전됐을 뿐 협력업체들의 재고부담은 여전히 늘고 있다는 게 현장에서 나오는 목소리다.

 지구촌경제에 기여한 미국과 주변국들의 역할, 그리고 우리경제를 이끄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을 다시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라고 역사는 가르친다. 혹시 도끼자루를 쥔 이들이 자기가 올라선 나무를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최근 미 테러사건으로 불거진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나 뮐러의 ‘문명의 공존’보다 훨씬 현실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