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벤처 르네상스

 ◆양승욱 생활전자부장 swyang@etnews.co.kr

벤처인가 닷컴기업인가, 닷컴이 벤처기업인가. 지난 2∼3년 동안 벤처기업을 으레 닷컴기업쯤으로만 알고 있던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이같은 질문은 다소 엉뚱할 수 있다. 구태여 벤처와 닷컴을 구분하려는 것은 닷컴의 몰락과 상관없이 벤처기업들이 우리 경제의 핵심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벤처기업의 성공이 인터넷이 아닌 제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벤처의 가장 큰 재산은 자본이 아닌 기술이기 때문에 막대한 초기투자비를 전제로한 제조업과는 성격상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트톱박스업체인 휴맥스를 비롯해 MP3플레이어제조업체인 MP맨닷컴, 노래반주기제조업체인 태진미디어 등은 이제 닷컴의 대표주자들이 사라진 공백을 부족함 없이 채워 주고 있다. 또 이들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지는 않지만 디지털웨이나 아이리버, 디지탈디바이스 등은 이미 세계적으로 그 성과를 인정받으며 제조업 벤처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벤처는 닷컴이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서 인터넷열풍이 사라지면서 거의 사라진 하나의 업태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게 지금의 모습이다. 닷컴기업들은 급격한 경제환경의 악화와 과다한 경쟁에 의해 M&A나 사업전환, 정리 등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져 왔다. 이것은 정책이나 누군가의 잘못에 의해 발생했다기보다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법칙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닷컴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원천기술만을 갖고 사업을 시작한 제조업 벤처들이 이제서야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닷컴기업들의 광채가 너무나 눈부셔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닷컴기업들이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온라인 대신 오프라인에서 대기업과 경쟁하며 사업을 전개해왔고 이것이 닷컴의 광채가 사라진 지금에서야 보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조업 벤처들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서는 데는 벤처기업으로서의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과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됐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 성공한 제조업 벤처에서는 공통된 몇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사업아이템이다. 첨단의 디지털기술을 담보로 한 디지털TV, 세트톱박스, 디지털오디오기기 등은 웬만한 대기업들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상품들이다. 또 틈새상품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몇가지 기능을 덧붙이는 게 아니라 기존 제품의 성능을 극대화하고 기존의 기술로 구현할 수 없는 첨단기능을 덧붙여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이들 벤처기업들의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공급받아 취급하고 있는 것은 결코 이들의 기술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사업이 확대되면서도 닷컴의 화려함이나 대기업에서 보이는 경직성이나 자만심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공통점 중의 하나다. 그들에게서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기존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는 무조건 제거대상이다. 실제 내년 50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는 휴맥스의 종업원 수는 300명에 불과하다. 개발을 제외한 생산 등 나머지는 모두 아웃소싱이다. 변대규 사장은 내년부터는 경영자의 마지막 권한이라는 인사권까지 아웃소싱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성공한 제조 벤처들의 또다른 특징은 내수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대부분 해외에서 승부를 걸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첨단 아이템인 만큼 아직까지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우리나라보다는 선진국에서 승부를 걸었고 남보다 한 발 앞선 성능의 제품은 선진국 소비자들을 수요자로 끌어들였다. 이 결과 휴맥스는 이미 세계 세트톱박스 분야에서 스타벤처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엠피맨닷컴이나 디지탈웨이 등 MP3플레이어업체들은 전 세계 시장의 5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또 아이리버는 MP3기능을 CD에 담은 MP3CD플레이어를 내놓으며 휴대용오디오에 혁명을 일으켜왔던 CD플레이어의 대체상품으로 주목받고 있을 정도다.

 이제 벤처와 제조업의 결합은 아니러니가 아니다. 어쩌면 벤처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곳이 제조분야일 수 있다. 다만 그 밑바탕에는 벤처정신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처정신을 간직한 제조업분야의 벤처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은 닷컴기업들이 가세할 때 우리 경제의 발전은 기약될 수 있다. 벤처 르네상스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