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하이닉스를 안판다면...

◆이택 산업전자부장

하이닉스 매각협상이 묘하게 흐르고 있다. 박종섭 사장이 미국에 가서 마이크론과 담판했던 지난주까지만 해도 순조로운 끝내기 수순만 남은 것으로 예상됐지만 지금은 사정이 매우 급박해졌다. 여기저기서 마이크론의 ‘터무니없는 조건’을 성토하고 심지어 소액주주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헐값매각 결사반대’운동을 펼치겠다며 벼르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며 한 발 물러선 채 여론 향배를 주시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최근 하이닉스 독자생존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도 모자라 여론을 등에 업고 강력히 전파되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 증권 애널리스트 등이 동원돼 독자생존 가능성을 짚는 분석을 잇따라 내놓으며 성난 하이닉스 개미투자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사실 양파 껍질 벗기듯 차례로 흘러 나오는 마이크론의 요구조건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40억달러라는 그럴 듯한 규모로 포장했지만 주식처분 제한에 풋백 옵션, 잔존법인 투자 철회 등 속내는 전혀 딴판이다. 한마디로 ‘털도 안뽑고 먹어 치우겠다’는 심산과 다름없다. 20년간 육성해온 국가 기간산업을 이처럼 송두리째 넘기는 것이 타당하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 정서법’에 의거, 하이닉스 매각이 불발로 끝날 공산도 커졌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고, 혼란이 가중될수록 원칙과 기본으로 돌아가 판단하면 된다.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하이닉스 처리를 매각으로 가닥잡은 것은 하이닉스 자체적으로는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6조7000억원에 이르는 부채 회수는 고사하고 살리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지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서의 선택이었다. 불을 보듯 뻔했던 하이닉스의 파산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충격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외곬 수순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메모리 가격이 급상승, 적자는 면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올라왔다는 호조건이 덧붙여진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그럼에도 하이닉스의 생존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비록 반도체 값이 지금보다 더 올라 엄청난 영업이익을 낼 수 있다하더라도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에서 나오는 이자조차 감당할 수준인지는 의문이다. 또 PC수요를 동반하지 않은 수급 차원의 반도체 가격 상승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이익을 내려면 2∼3조원의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과연 이 돈을 선뜻 내주겠다는 채권단이나 주주가 몇이나 될까. 팔지 않고 버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가 자금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의 정서와 감정으로 행동하다 후에 파산이라는 극한으로 몰리면 우리 경제도 휘청이게 된다.

 마이크론은 미국기업이다. IMF시절의 은행 매각, 대우자동차 협상 등을 꿰뚫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마이크론의 요구조건도 이미 외국기업이 한국에서 한번쯤 써먹었던 수법이다. 이런 사실을 도외시하고 ‘현찰 40억달러’를 줄 것으로 믿었다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우리도 예상했어야 했다. 이제와서 분통을 터트리고 소리를 질러봐야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이닉스 경영진, 채권단, 주주들이 반드시 관철해야 할 아젠다를 우선순위별로 정하는 일이 급선무다. 고용문제를 못박든지, 잔존법인 투자를 요구하든지 매각 이후의 비전에 협상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우자동차, 한보철강의 전철을 되밟아선 곤란하다. 정 마이크론에 못팔겠다면 같은 조건으로 국내기업에 매각하는 방법도 대안이다. 지금은 원칙을 되돌아 볼 때다. 하이닉스는 우량기업임에도 외자유치를 위해 지분을 내다파는 KT나 포항제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