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한국지사장의 자리

 세계적인 IT기업의 한국지사장은 수많은 IT인들에게는 선망의 자리다. 일단 자신의 경력을 외부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증명이기에 명예의 상징일 수 있다. 또 명예에 걸맞은 연봉이 주어지는 것도 물론이다. 자리가 하나 빌 때마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내로라하는 IT인들은 헤드헌터의 손길이 자신에게까지 미치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자리가 비거나 외국업체가 새로 진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누가 어느 업체의 인터뷰에 응했다든가 내정됐다든가 하는 소문이 꼬리를 잇는다. 최근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와 한국유니시스를 과연 누가 맡을 것인가가 엔터프라이즈업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같은 IT인들의 선망 한켠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비록 명함에는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대표(CEO)라고 찍혀있지만 외국 제품을 한국에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단순한 영업책임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외국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회의는 그 회사를 이끌어가는 CEO이기에 더 심각할 수 있다. 회사 업무에 관한 결정과 집행을 담당하는 등 경영전반을 총괄하는 대표가 단순히 영업책임자 정도로만 이해되고 있다면 CEO의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국법인 지사장이 한국 내 영업책임자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지사장들은 외국 본사의 직속이 아닌 아시아태평양지역 영업본부 산하다. 당연히 매출을 늘리는 것이 지상과제다. 영업이 잘 됐을 경우 이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지만 실적이 부진할 경우 당연히 퇴진 대상이 된다. 따라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최근 IT시장에 만연하고 있는 덤핑경쟁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당장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또 저가수주에 따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수익을 올리기 위한 또다른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본사에 대한 입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할 것 아니냐는 주문에는 실적이 밑바탕돼야 한다는 말로 대신한다. 실적없이 어떻게 우리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수준을 본사 전체 매출의 1% 정도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기준은 한국 IT시장 규모가 세계 IT시장의 1% 정도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1%를 상회하는 실적을 올리는 지사장은 우수한 지사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IT업계의 정설이다. 한국 IT시장의 성장세가 커질수록 이들 외국기업 한국지사장들이 받는 압력은 한국 IT산업의 성장세만큼 비례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실적뿐만이 아니다. 정보보고라인을 지사장 외에 또다른 라인을 운영한다거나 책임만 부과할 뿐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등 대표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과거 1년 만에 4명의 지사장이 교체되거나 갑작스럽게 해임통고를 받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고 5년 이상 한 자리에서 자신의 구상대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외국지사장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외국 본사의 한국지사장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 IT산업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한국지사의 위상 또한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지사장에 대한 본사의 인식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같은 불행한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최근 자리가 비어있는 외국지사장 자리는 단순히 매출을 올리는 데 급급한 영업맨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거기에 대해 떳떳이 본사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는 진정한 경영자가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IT업계 일각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외국지사장들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정보화를 앞당기는 데 기여하겠다’는 신념과 포부가 단순히 구두선에 그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양승욱부장 sw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