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국제부장 jspark@etnews.co.kr
‘사장을 쫓아내려면 직원들은 일을 하지 마라(?).’
최근 미국과 일본 산업계의 동향을 보면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새로운 법칙’이 성립될 법하다. 세계적인 경영 귀재들조차 대규모 적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회사를 줄줄이 떠나야만 했다.
세계 최대의 유닉스 서버업체인 선을 만들어낸 경영 귀재 에드 잰더가 이달 초 회사를 떠남으로써 월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을 경악케 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장거리전화업체인 월드컴의 버나드 에버스와 인텔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반도체업체인 AMD의 창업자 제리 샌더스, 세계 최대 컴퓨터업체인 IBM의 루이스 거스너도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끌던 AOL타임워너의 제럴드 레빈 사장도 부사장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일본도 지난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한 NTT의 미야즈 준이치로 사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미 지난해 초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CEO에서 물러난 후 CEO의 ‘엑소더스’는 끊이지 않고 있다.
기업체가 적자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나 그로 인해 CEO가 무더기로 물러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더욱이 사장이 싫다고 해서 직원들이 일을 태만히 하는 경우는 더 드물다. 설령 그 같은 기미가 아니라도 경영자들은 경영이 어려워지면 구조조정을 한다. 선의 잰더 사장이 지난해에만 3900명을 해고한 것을 비롯해 실적이 좋지 않은 경영자들은 수없이 많은 종업원을 해고했다. 심지어 좀처럼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던 IBM조차 감원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미국 기업체는 물론 마쓰시타와 소니 등 일본 기업들도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경영자로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이사회와 주주들의 압력 때문이다. 수요 부진으로 인해 주가 하락이 지속되면 그 책임은 사장의 몫이다. 어쨌든 현재 미국과 일본에는 낯익은 회사에 귀에 설은 이름이 사장 자리에 오르고 있는 일이 흔한 일이 돼버렸다. 어쩌면 앞으로도 사장의 목숨은 무엇보다 지구촌의 경기에 달렸는지도 모르겠다. 경영능력으로는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여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시스코의 경영호전 소식은 경영자들에게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적으로 들릴 것 같다. 인텔과 IBM이 컴퓨터에 집착하고 있을 때 인터넷에 뛰어들어 슈퍼파워가 돼버린 시스코는 3분기(2∼4월)에 7억2900만달러의 이익을 실현했다. 지난해 3분기에 무려 27억달러의 적자를 본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시스코의 이 같은 실적만으로 닷컴기업이나 IT기업이 바로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에서 필수적인 장비인 라우터의 수요 증가가 있었다는 것은 닷컴기업의 경기회복을 알리는 징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그것이 세계 경기의 첨단을 걷는다는 실리콘밸리에서였다는 점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낙엽 한 장으로 가을이 깊었음을 깨닫고, 한 마리의 제비로 봄을 느끼듯 시스코로 인해 닷컴기업의 봄소식을 기대하고 싶다. 매일같이 외신을 접하면서 경영책임을 진 사장들이나 또 종업원들이 본의 아니게 회사를 떠나는 소식보다는 그들이 회복된 경기 속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소식을 주고받고 싶은 것은 국제부장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