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IT업계의 CEO들이 모이면 화젯거리로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사령탑이 공백상태인 일부 다국적기업들이 과연 언제쯤 새로운 CEO를 영입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최근 희망퇴직프로그램을 가동한 한국HP의 획기적인 보상제도다.
일전에도 한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한국유니시스, SAP코리아, 델코리아 등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다국적기업의 지사장 자리가 벌써 몇달 째 공석인 채 임시대표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또 얼마 전에는 세계적인 네트워크전문업체인 어바이어코리아의 지사장도 사표를 제출, 임시대표체제로 운영되는 회사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만이 새 CEO를 영입했을 뿐이다.
아직까지 대표를 찾지 못한 업체들은 하나같이 인물난을 거론한다. IT산업 종사자가 한두명이 아니지만 지사장자리에 모실 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와 공공기관, 기업들이 전산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한지 벌써 3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같은 긴시간 동안 외국계 지사장자리를 맡을 만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동안 우리 IT업계는 인재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IT산업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우수한 인재는 있지만 다만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들린다. 또 하나는 굳이 CEO를 IT분야에 국한해 찾는다는 것도 문제다. 이미 IT가 전산업의 핵심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IT분야 외의 훌륭한 인재를 IT산업쪽으로 영입하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엔지니어나 영업맨을 찾는 게 아니라 전문경영인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세간의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HP의 퇴직프로그램은 보통 ‘2N+3’이라는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희망퇴직자들의 근무연수(N)에 2를 곱하고 여기에 3을 더한 수치에 월평균임금을 곱한 만큼의 액수를 퇴직위로금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 동안 한국HP에 근무한 사람은 평균임금에 23을 곱한 금액을 위로금으로 받는다는 의미다. 물론 퇴직금은 별도다.
컴팩코리아와의 합병으로 중복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는 한국HP가 다국적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도 커다란 문제없이 마무리작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배경에는 다국적기업으로서는 흔치 않은 이같은 퇴직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한국HP의 퇴직프로그램이 올 하반기 IT산업 전체에 대규모 인력이동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진원지가 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 업계의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두가지 사안은 모두 사람들에 관련된 이야기다. 다만 한쪽은 적임자가 없어 사람을 찾지 못하고 어느 한 쪽은 사람이 넘쳐 사람을 줄이는 전혀 대조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닷컴열풍 이후 유달리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인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IT산업에 이 두가지 사건은 IT산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줄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모든 조직의 근본은 사람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인적요소의 변화를 통해 국내 IT산업의 체질을 바꾸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계기를 마련하기에는 지금이 적기다. 외부 투자환경이 전혀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IT산업의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라도 계기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매출부진과 비전부재에 허덕이고 있는 많은 IT기업들에 대대적인 인력이동과 이로 인한 새로운 인력의 영입, 그리고 세대교체는 침체된 국내 IT산업의 분위기를 일신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승욱 엔터프라이즈부장 swy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