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현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하나를 들라고 하면 ‘국가 안보’를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라의 안전과 보장은 액면 그대로라면 마다할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좌우가 대립하는 분단국가로서 전쟁의 위협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공포였다. 그래서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보강하는 데는 반대가 있기 어렵다.
문제는 안보라는 말이 때때로 남용되는 데서 발생한다. 정치권에서는 수십년 동안 안보 논리를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거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을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고 몰아붙이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과거 왕조시대에 실제 ‘역모’를 꾀한 사람보다 역모로 몰아붙여져 처단된 사람이 더 많았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안보’도 그와 닮은 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인권이 잘 보장되고 있다는 미국도 한때 반지성적이고 반문화적인 매카시즘으로 인해 사회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래서 미국도 안보 논리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미국은 지난해 9·11테러 이후 안보의 중요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테러리즘 방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수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9·11테러와 같은 물리적인 테러 재발 방지는 물론이고 사이버공간에서의 테러에 대해서도 부쩍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부시 대통령이 최근 발표한 ‘사이버보안에 대한 국가 전략’도 이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 이번 조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기경보시스템 구축을 비롯해 해킹이나 사이버공격을 막기 위해 인터넷이나 민간 네트워크의 운용을 중지할 수 있는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는 당초 삽입하려던 ‘안전조치가 검증되기 전까지 무선네트워크의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 등 비교적 강력한 조치가 삭제됐는데도 ‘국가 안보 앞에 사생활은 없다’며 일반인들의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
또 이와는 달리 보안전문가들은 “정부의 구체적인 역할이 미약하다”고 말한다. AFP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보안책임자 가운데 59%가 ‘컴퓨터 공격을 물리적 공격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다’고 응답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그 일당이 인터넷을 통해 인명살상무기를 들고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이버테러를 통해 데이터를 파괴하거나 통제(컨트롤)시스템을 무력화할 경우 그 피해가 더 심각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사회 각 부문이 정보화돼 있는 것을 감안하면 사이버테러가 대규모로 이뤄질 경우 경제적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번 사이버보안 조치는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사이버테러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1년 이상을 진지하게 고민해온 과정 자체로서도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디지털 진주만 공습’에 대비하면서도 다소 과장된 듯한 ‘Y2k문제’와 달리 사이버보안 문제에는 인명살상과는 분리시키면서 과장된 위험이나 위협을 조장하지 않은 점도 본받을 만하다. 비록 이번 조치를 폄하해 선언적 의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사이버테러에 대한 대응은 ‘개방’이라는 인터넷의 특성상 전세계가 공조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사이버테러에서 예외일 수 없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이제 예방책 마련을 위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과장되지 않고 진지하게 접근하는 일을 남겨두고 있다.
<박재성 국제부장 js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