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엽과 김형순은 한국 벤처의 얼굴이다. 그동안 수 많은 벤처 스타들이 명멸했지만 굳이 이들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는 것은 두 사람이 걸어 온 기업가의 길이 생산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한국 벤처산업의 양대 조류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병엽 팬택부회장은 삐삐 생산업체에서 출발해 지금은 한 해 매출 2조원에 육박하는 세계적 이동전화 단말기업체를 이끌고 있다. 생산량의 90% 이상을 전세계에 수출하는 한국 최대 벤처기업가가 됐다. 김형순 로커스 사장은 CTI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와 통신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분야까지 진출, 거대한 사업실험에 도전중이다. 그는 유창한 영어실력과 비즈니스 트렌드를 꿰뚫는 사업가적 ‘눈’으로 한국 보다는 해외 투자가들에게 훨씬 유명한 인물이다.
이들은 동년배라는 점을 제외하면 커나온 환경에서 경영스타일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벤처 궤적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사람은 곧잘 비교된다. 박병엽이 고 정주영 회장의 이미지를 가졌다면 김형순은 고 이병철 회장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물론 이들은 정주영 회장이나 이병철 회장의 반열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막 기업가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박병엽은 큰 승부에 유난히 강한 승부사 기질이 남다르다. 변신을 시도해야할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도전을 감행한다. 삐삐업체를 휴대폰업체로 탈바꿈시킨 것이나 모토로라의 지분 유치가 그렇고 현대전자의 단말기부문을 인수해 팬택&큐리텔을 출범시킨 것 등이 그 예다.
경영의 주요 포인트 가운데 하나인 결단력과 추진력은 무서울 정도다. 그는 사업수완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는다. 대인 친화력은 어지간한 정치인 빰칠 정도다. 무모한 도전을 소프트랜딩시키는 숨은 힘이다. 그는 박사출신도 아니고 서울대를 졸업한 것도 아니다.
김형순은 해박한 경영이론과 치밀하고 정교한 비즈니스 모델 개발이 탁월하다. 앞으로 돈이 되는 분야가 어떤 것인지 남보다 한 발 앞서 읽어낼 줄 아는 자질 역시 뛰어나다. 그의 사업계획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준다고 한다. 로커스는 외자유치에 관한한 대부분의 ‘기록’을 갖고 있다.
벤처거품이 한창일 때 정신나간 일부 벤처인들은 펀딩자금 까먹기에 세월가는 줄 몰랐지만 김형순은 엔터테인먼트로 눈을 돌렸다. 벤처정신으로 승부할 만한 곳이며 진정한 고부가산업이 엔터테인먼트라는 판단에서 였다. 그의 선택은 역시 외국인들의 전폭적 지원 아래 어느정도 성공했다. 김형순의 대인 친화력도 박병엽 못지 않다. 겸손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미국 유학을 했고 최고 명문대에서 MBA를 했다.
두사람은 한국 벤처의 부침을 뒤로 하고 전환기에 서 있다. 혹독한 시장의 검증을 거쳤지만 그간의 영광을 업고 한 단계 도약해야 할 의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우리에겐 채 10년도 못돼 ‘신화’를 접고 마는 포말성 벤처가 너무 많았다. 김형순과 박병엽은 나이 역시 40줄에 들어섰다. 만족하는 순간 편안하고 쉬운 길을 찾으려는 유혹에 흔들릴 만한 ‘연령적 요건(?)’을 갖추었다. 선택은 본인들의 몫이지만 이들을 통해 한국벤처의 방향을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택 정보가전부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