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성 국제부장
연극과 컴덱스 쇼는 여러모로 닮았다. 관람객에게 쇼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부터 동일하다. 연극이 연출자와 배우, 극장으로 구성된다면 컴덱스도 업체가 연출을 통해 제품을 배우처럼 무대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연극무대도 다 같은 게 아니라 대표 주자가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지만 뉴욕 42번가의 브로드웨이 공연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각 나라의 마니아들은 좋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 위해 일부러 브로드웨이를 찾을 정도다. 컴퓨터를 포함한 전자제품 관련 전시회도 많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추계 컴덱스다. 그것은 IT(정보기술)인들에겐 매년 빼놓을 수 없는 ‘순례지’와도 같은 곳이다.
연극을 보지 않고서 그것을 논할 수 없듯 컴덱스에 가지 않고서는 IT분야에서 앞서간다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행세를 하기는 커녕 따돌림 당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올해 컴덱스는 썰렁하기만 하다는 소식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2000여개에 달했던 참가 업체가 올해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니 급기야 주최측인 키3미디어는 컴덱스를 도저히 운영할 수 없어 파산보호신청을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할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령 컴덱스가 문을 닫는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을 것이다. 나도 미국인, 특히 컴덱스가 열리면 도박으로 흘리고 가는 돈 때문에 흥청거린다는 라스베이거스 시민도 아니고, 주최측과도 아무 이해관계가 없으니 그 중 하나다.
또 컴덱스가 지난 79년부터 시작돼 IT산업 견인에 한 몫을 했지만 이제 그것이 부실해진다고 해서 미국 언론들이 말하는 대로 IT산업이 따라서 망할 지경에 이를 것 같지는 않다. 하나의 극장이 없어진다고 해서 연극이 사라지는 일은 당장 일어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비평가는 이번 컴덱스가 ‘기술도 혁신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관록이 있는 만큼 그 파급력이 크다는 점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해 컴덱스 관람객 수는 지난해 20만명의 절반밖에 안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그들 중 대부분이 CEO나 엔지니어 등 실제로 제품개발이나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이 현지 분위기다. 참가 업체 측면에서 보면 소위 어중이떠중이는 걸러지고 알짜배기로 채워진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을 예상했는 지는 알 길이 없지만 IBM을 비롯한 인텔 등 해외의 유명 업체들은 컴덱스에 참여는 안했지만 인근 호텔에 제품을 전시함으로써 ‘실수요자’를 맞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 반면 한국의 대기업체들은 삼성전자 미국 현지법인을 제외하고는 이번 컴덱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이크로소프트·HP·IBM·e베이 등 업체들이 컴덱스에서 연일 외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 업체에 관한 기사는 거의 찾아보기도 어렵다. 세계 IT분야에서 5∼6위 정도라는 한국의 명성이나 세계 일류를 지향한다는 대기업체의 구호가 무색할 정도다. 심지어 중국 부스에 사람이 몰리고 있다는 보도가 훨씬 자주 등장한다. 매출이 수천억 원에서 조단위에 이르는 한국 대기업체들이 잔돈 아끼려다가 관객(고객)만 놓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부스를 꾸미며 컴덱스에 참가하던 대기업이 자금 사정이 좀 안좋다고 별 대책없이 관객을 외면하는 행태는 IT업계의 또 다른 ‘냄비 근성’과 무엇이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