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 디지털산업부장 shyu@etnews.co.kr
“삼성전기가 하나만 더 있으면….”
어느 공직자의 하소연이다. 결코 삼성전기를 칭송하려는 뜻이 아니다. 삼성전기를 옹호하려는 의도도 없다. 이 공직자가 무심코 내뱉은 이 말속에는 뼈저린 아쉬움이 배어 있다. 사실 ‘삼성전자같은 회사가 몇개만 더 있다면 한국 경제가 달라질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 않은 국민들이 있을까. 미국에 건너가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인으로서 삼성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달았다는 어느 지인의 이야기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삼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국민들의 자긍심과 국가경제를 드높이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기가 하나만 더 있으면’이라는 바람은 삼성전자의 경우와는 다르다. 자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삼성전기 정도의 회사가 하나 더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이미 세계 제조기지로 부상한 중국이 한국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상품들은 대부분 중국 손에 넘어가버렸다. 황금알로 떠올랐던 휴대폰도 이제는 중국의 추격으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지경이다. 머지않아 메모리반도체마저 위협받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은 앞으로 무엇으로 먹고 살겠는가?’ 지난 2001년 말 톈진에서 자리를 같이했던 중국 기자들의 한결같은 질문이었다. 섬뜩했다. 정부도 안다. 그래서 반도체·휴대폰의 대를 이을 수출효자상품의 발굴에 바쁘다. 방송과 통신이 결합된 디지털컨버전스 제품이 가장 확실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디지털TV와 같은 디지털컨버전스 제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속에 녹아든 복잡다단한 소프트웨어와 첨단 부품·소재가 핵심경쟁력이다. 소프트웨어에서는 일본을 뛰어넘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품·소재만큼은 일본 왕국에 여전히 종속돼 있다. 메모리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등 능동·기구부품에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지만 수동부품에서만큼은 한참 뒤처져있다. 반도체와 휴대폰도 수익의 상당부분이 부품과 소재를 사와야 하는 까닭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의 명성을 이어갈 핵심부품산업에 골몰하고 있다. 수백 수천가지 부품이 세계 일류상품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비빌 언덕이 없다는 점이다. 삼성전기만 덩그러니 외로운 섬처럼 버티고 있을 뿐이다. 세트업체들은 삼성전기 하나만으로는 핵심부품 국산화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안정적인 부품조달에 늘 불안하다. 더욱이 소재업체들은 국산화를 시도하려 해도 규모의 경제가 안된다고 울상이다. 소재와 부품, 완성품으로 이어지는 유망산업간 전후방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데 관심의 대상에서 소외되었던, 그래서 더욱 취약했던 수동부품산업이 병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품산업에서마저 컨버전스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디지털컨버전스의 핵심인 시스템온칩(SoC)이 그것이다. 시스템온칩은 CPU에 주변기능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술이다. 능동부품의 집적화에 못지않게 수동부품과 소재의 통합도 중요한 변수다.
디지털화가 진전될수록 먹고 마시고 즐기는 아날로그적 인간의 삶이 중요해진다. 디지털화도 삶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존재한다. 제품도 마찬가지다. 디지털화가 진전될수록 아날로그적 소재와 부품의 내재화가 절실히 필요해진다.
지금처럼 막대한 국부의 외부 유출을 감내한, 소프트웨어만의 디지털컨버전스화는 절반의 성공도 거두기 힘들다. 삼성전기가 하나 더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