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다. 받는 사람에겐 적당한 설렘과 흥분, 두려움이 앞선다. 자신이 아닌 남들의 평가라는 점에서 반성과 재도약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25일로 집권 6개월을 맞은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작업이 한창이다. 물론 6개월짜리 정부를 칼처럼 재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성적만으로 대학 입학 여부를 점치는 성급함을 저지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의 지난 6개월 성적표는 낙관적이 아니다. 적어도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인은 역시 ‘삶의 질’에 관한 냉정한 평가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지난 6개월 동안 내 주머니가 두둑해 졌는지, 집값은 안정됐는지, 우리 아이 학교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는지를 먼저 따진다. 그런 점에서 삶의 질을 후퇴시키는 어떠한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는 평범한 명제를 참여정부 6개월의 여론조사가 확인시켜주고 있다.
내수가 꽁꽁 얼어 붙고 물가는 뛰었다. 20대의 젊은 실업자가 넘쳐 나고 아파트값은 도대체 천정을 모른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에게 북핵문제나 이라크 사태, 세계 경제 환경을 들이밀어야 소용이 없다. 로드맵을 만들고 시동을 거는 기간이니 기다려 달라는 주문에도 박수를 칠 여유가 없다. 경제를 살리지 못한 어떤 정부도 ‘합격점’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기업들은 투자하지 않는다. 상황이 불투명하다고 느낀다. 동북아 시대에서 소득 2만달러까지 거창한 구호가 난무하지만 믿지 않는다. 규제는 여전하고 정치권력의 향배에 따른 사업 환경 변화는 예측 불가능이다. 일반인들의 체감경기는 더하다. 지갑을 아예 닫고 산다. 오죽하면 추석 대목에 백화점이 세일을 할 정도다. 투자와 소비 생산이 모두 뒷걸음질이다.
이것만은 꼭 잡겠다던 강남 아파트값은 정부를 비웃는다. 집값은 여전히 오른다. ‘월급쟁이를 봉’으로 만든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은 적어도 셀러리맨들에겐 개악(改惡)이 되고 있다. 아직도 봉급 생활자에 비해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의 세금은 턱 없이 적다. 거대한 고시준비반으로 전락한 대학의 모습은 바뀐 것이 별로 없다.
나이스인지 네이스인지로 교단이 갈라져 싸우면서도 학교 폭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인권은 고사하고 우리 아이들을 마음놓고 학교 보내기조차 겁나는 이 ‘도망가고 싶은 현실’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참는 판에 이런 경제정의, 사회 정의는 지난 6개월 동안 ‘진보’가 없었다.
현자(賢者)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라”“그것이 네가 성공하고 나아가 사회와 역사에 이바지하는 길이다”라고. 이 평범한 명제가 가정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도, 정부도 가장 잘 할 수 있는 아젠다를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승부해야 한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10년, 20년 우리가 먹고 살 거리를 만들고 육성하는 일’이다. 성장동력을 세우고 이공계 진출을 늘린다. 규제를 풀고 시장을 존중하며 과학기술에 전념한다는 방향도 잡았다. 남은 것은 국정 최우선 순위로 대통령과 정부가 강력한 실천을 독려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돼야 ‘일상(日常)’의 경제정의, 사회정의도 실현된다. 거대 담론만을 쫓기에는 국민들의 하루하루가 너무 팍팍하다.
<이택 취재 부국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