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아, 2003

 벌써 12월이다. 2003년도 어느듯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한 해의 말미에는 누구나 애틋한 감상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다가올 새해에 대한 희망이 샘솟을 수록 다시 오지 못할 그 시간들이 아련한 추억과 회한으로 사무친다.

 하지만 올해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새김질 하기가 두렵다. 하루빨리 2004년이 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2002 월드컵신화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맞은 2003년 원단의 태양은 정말 붉디 붉었다. 설레이는 마음을 가눌길 없었다. IMF 이후 모처럼 호전되는 무역수지는 다시 한번 한국의 번영을 예고 했다. 차세대 성장동력은 제2, 아니 제3의 한강의 기적을 일굴 걸로 믿어마지 않았다. 붉은 악마의 후예들, 노사모, 인터넷이 만들어낸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새 시대를 열어갈 희망으로 자리잡았다. 젊고 신선한 386으로 포진된 청와대는 혁신과 창조의 심장이 될 걸로 믿었다.

 하지만 원단의 붉은 태양빛은 착시였던 걸까. 기대와 희망으로 벅찼던 2003년은 한 해 내내 좌절만 안겨주고 있다.

 민주화의 영웅,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386 참모들은 1년도 안돼 각종 구설수로 빛이 바래버렸다. 영남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당은 호남당의 껍질을 깨지 못하고 끝내 분당하고 말았다. 정치권은 벌써부터 내년 총선을 겨냥, 힘겨루기에 혈안이다. 국민들의, 기업들의 내년 총선 걱정은 더해만 간다.

 경제는 더 질퍽이고 있다. IMF로 얼어붙었던 해외시장은 봄이 온다고 야단인데 내수는 꽁꽁 얼어붙은 채 동면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다. 온 국민을 전과자로 만든 카드사의 부실로 제2의 IMF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동북아 허브의 꿈은 운송노조의 파업으로 치명상을 입었고 외자유치마저도 최악이다.

 노사문제는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노동자의 분신이나 사라졌던 쇠파이프는 물론 가스불까지 난무하고 있다. 풀죽은 국민들을 대변이라도 하듯 월드컵 4강신화의 축구는 연패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던 차세대 성장동력마저도 부처이기주의로 혼선만 증폭되고 있다. 무언가에 꽉 막혀 버린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2003년이지만 하루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새해가 가까울수록 낭보가 날아든다.

 이 암흑의 와중에도 애니콜은 꿋꿋이 세계를 정복해나가고 있다. 자존심의 소니가 삼성의 힘을 빌어보겠다고 LCD 합작공장을 세웠다. MP3플레이어 하나로 소니 워크맨의 신화를 능가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벤처도 있다. 세계적인 통신업체들이 한국을 R&D센터로 여기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일본이 국보처럼 애지중지하던 부품공장마저 이젠 한국에다 앞다투어 짓고 있다.

 세계 경기가 완연히 살아났다는 즐거운 소식이 연일 타전되고 있다. 총재 혼자서 좌지우지하던 공천권이 당원들 손에 쥐어질 혁명적 조짐도 일고 있다. 차세대성장동력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담론도 다시 시작됐다. 연패를 거듭하던 축구도 되살아나고 있다.

 소득 1만불을 즈음해 혼란을 겪지 않은 곳은 없다 한다. 개개인들의 감추어진 욕구가 봇물터지듯하기 때문이리라. 하물며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정치적 격변을 거듭해온 우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정도의 혼란과 좌절은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2003년에 겪어야만 했던 우울한 기억들은 껍질을 깨는 아픔이었으리라.

 2004년엔 다시 시작하자. 절망으로 가득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2003년을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 1만불의 변곡점을 뛰어넘어 2만불 고지로 달려나가는 데 지혜와 힘을 모으자.

<유성호부장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