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1세기 디지털 전쟁이 시작됐다. 가전,정보화 전쟁에 이은 3차 대전이다. 이번 전쟁에는 그동안 아웃사이드에 머물던 한국이 당당히 주역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를 더한다. 사실 세계 IT 역사에는 1,2차 세계대전에 못지 않은 두번의 전쟁이 있었지만 한국은 주변국에만 머물렀다. 1차 대전은 20세기 중후반에 벌어진,안방을 차지하기위한 가전 전쟁이었다.
아날로그 방송과 TV의 출현으로 촉발된 가전 싸움은 흑백과 컬러시대를 거치는 동안 미·일·유럽간 치열한 3파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이 전쟁은 걸출한 영웅, 소니의 탄생으로 결국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한때 미국의 제니스,유럽의 필립스와 톰슨 등이 이들과 팽팽한 전투를 치루었다. 그러나 소니외에도 마쓰시타, JVC와같은 쟁쟁한 우군을 이끈 일본에 패했다. 가전 전쟁의 승리는 2차 세계대전으로 패망한 일본이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전 전쟁에 이어 벌어진 2차대전은 소위 정보화 전쟁이었다. 90년대 초반 엘고어 부통령이 정보화 고속도로를 제창하며 정보화 산업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내세워 미국의 영광 재현을 노리면서부터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은 실리콘밸리 중심의 기업들은 삽시간에 세계를 제패해 나갔다. 오늘날의 MS,인텔,IBM,오라클,HP,델과 같은 세계 IT업계의 메이저들이 그 주역들이다. 안방이 아닌 사무실을 주무대로 펼쳐진 정보화전쟁에서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빌게이츠가 쓴 ‘생각의 속도’에서처럼 정보화의 변방국들은 눈부신 속도전에 미처 대응할 생각이나 준비조차 할수 없었다. 1차대전의 승리국이었던 일본도 매한가지였다. 승리의 점유지였던 가전시장이 포화됨에 따라 20세기 후반에는 흔들리는 공룡으로 전락했다. 당연히 소니의 아성도 퇴색됐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미 IT 메이저들의 전유물이다시피한 사무실 시장이 성장속도만큼이나 급속도로 포화상태로 접어들었다. 지상 최대의 쇼로 주목받던 미 컴덱스쇼도 하루아침에 허물어져 버렸다. 반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교체바람을 타고 가전시장이 새로운 황금어장으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1,2차 대전의 승자들은 모두 디지털 가전시장을 선점하기위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가전의 왕자였던 일본은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미 IT메이저들은 또다시 뼈아픈 패배의 쓰라림을 겪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소니,마쓰시타,후지쯔,샤프,JVC 등등 일본의 전사들은 가전에서만큼은 자신있다는 각오다. HP,델,MS,인텔 등 미국의 정예들은 지금은 시장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승리를 장담한다.
화려한 컴덱스의 빛에 가려 관심의 한켠에서 사라지다시피했던 CES가 다시 흥겨운 잔치로 돌변했다. 가전과 정보화의 만남, 소위 디지털컨버전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3차대전이 미국과 일본, 양 승전국들간의 재시합만이었다면 재미가 덜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니다. 정보화를 능가하는 무선통신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타고 급부상한 유럽의 노키아, 미국의 퀄컴이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을 능가하는 다크호스가 도사리고 있다. 가전과 디스플레이, 무선통신 3박자를 고루 갖춘 한국의 삼성과 LG다.
미국과 일본에 좌우돼온 세계 IT산업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다. 언제나 변방으로 홀대받아온 한국과 유럽의 신흥 세력이 어떤 판도변화를 가져다 줄지 궁금해진다. 3차 디지털 전쟁이 재미있고도 가슴 설레이는 이유다.
<유성호 디지털산업부장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