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같은 회사 10개만 더 있으면…” 대통령에서 일반인들까지 우리 경제의 앞날을 전망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한국에는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10개쯤 더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정경유착이란 비판을 무릅쓰고 특정업체에 특혜를 주는 것이다. 정부와 산업자본의 총동원령이면 고속 압축성장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손 놓고 있는 것이다. 정글의 법칙이 시장을 지배하도록 보고만 있으면 된다. 요즘 같은 환경이라면 한국에 기업이라고는 10대 재벌만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경우든 현실성이 없다는 점이다. 특혜는 곧 부패와 정치적 논란을 낳는다. 21세기에는 꿈도 못 꿀 형편이다. 정글법칙을 선택해도 비슷하다. 국가의 자본, 인적 자원, 개발 역량이 소수의 몇 곳에 집중된다. 계급갈등만 불거진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아닌 약탈적 야수(野獸) 자본주의를 용납할 국민은 없다.
그렇다면 그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대안은 이미 김대중 정부가 제시했다. 벤처기업, 중소기업의 건강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똑똑한 벤처기업, 견실한 중소기업 100개를 만들면 삼성전자 2개 몫은 한다. 고용 기여도는 훨씬 높다.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정치적 인프라와 안정도 역시 탄탄해진다. 참여정부가 주목하는 가치와도 일치한다.
하지만 현장은 다르다.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도 모자라 이제는 기업 규모별 양극화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수출하는 대기업은 최고 실적이다. 반대로 내수에 목 맨 벤처·중소기업은 최악이다. 숫자는 ‘최악’이 몆십배 많다. 이런 판에 정부와 금융자본이 하는 일은 벤처·중소기업 목 죄는 일밖에 없다. 수백 수천의 IT 벤처·중소기업이 정부 말만 믿고 투자했다가 낭패만 보고 있다. 디지털TV 전송방식부터 IMT2000, 위성 및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등 신규 서비스가 모조리 표류하고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벤처·중소기업들이 사람과 돈, 시간을 들여 개발하고 상품을 만들어도 납품할 곳이 없다. 대기업은 수익성 탓만 하며 투자(물건 사는 일)는 뒷전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정치적 논의에 휘말려 갈팡질팡이다. 지키지도 못할 표준 방식 발표해 놓고 시간만 끌고 있다. 그 사이 피해는 애꿎은 벤처·중소기업이 고스란히 떠 안고 있다. 정부가 도와주진 못할망정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휴대폰에서 보듯 조금만 삐걱하면 금융권은 자금부터 회수하려 달려 든다. 돈은 남아도는데 굴릴 곳이 없다고 푸념하는 것이 금융권이다. 그런데도 IT산업에는 어찌 그리 냉혹한 칼을 들이대는지 아연할 뿐이다. 창업과 운전자금 대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틈만나면 “기술을 담보로 융자하겠다”고 외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특히 소프트웨어 업종의 경우 기술 담보는 남의 나라 일이다. 부동산 담보가 없으면 은행 문턱에서 퇴짜다.
벤처·중소기업들이 바라는 것은 특혜가 아니다. 그들은 정부의 신뢰를 요구한다. 정부말을 믿고 따르면 손해보는 현실을 바로 잡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경제정책 최우선 순위가 벤처·중소기업 살리기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를 사회적 분위기로 몰고 가도 좋다. 대통령도 “경제는 마인드”라고 했다. 지난 정부의 패착을 거울 삼아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한 정책적 대안도 필요하다. 삼성전자 10개 만드는 것보다 성공한 벤처·중소기업 수백개 만드는 것이 더 쉽다.
<이택 편집국 부국장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