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자 비즈니스위크는 세계 IT산업을 선도하는 100대 기업 명단을 발표하면서 LG전자와 삼성전자를 각각 1위와 11위에 올려놓았다. IBM·HP·인텔·오라클·모토로라 등 기라성 같은 기업들을 물리치고 우리 기업이 당당하게 선두권에 진입한 게 왠지 어색하지만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매체가 한국 기업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
이번 100대 IT기업 선정은 S&P가 확보하고 있는 IT기업들의 재무 자료를 바탕으로 이뤄졌는데 1년간 75% 이상 주가가 하락한 업체, 매출이 감소한 업체, 성장성이 의문시되는 업체, 비경쟁 환경 하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는 시장 지배적 사업자 등은 심사 과정에서 배제됐다. 선정 기준은 자기자본이익률(ROE), 매출액 증가율, 주주 이익 환원 정책, 총매출 등이었다. 물론 국가별로 회계기준이 다르고 개발 능력 등 기업의 미래가치를 평가할 만한 변수들이 제외된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지만 나름대로 변별력을 확보했을 것으로 믿는다.
이번 100대 기업 명단을 자세히 보면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대만 기업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것. 우리 기업 중 LG전자·삼성전자·SK텔레콤 등 3개 기업만 40대 기업에 명함을 내민 데 비해 대만 기업은 콴타컴퓨터·혼하이·컴팔·AUO·라이트온·에이서 등 10개 업체가 올라가 있다. 대만 업체 대부분이 PC와 주변기기 및 부품 업체라는 점에서 이 업체들이 글로벌 IT시장에서 차지하는 중량감을 체감할 수 있다. 물론 대만 PC산업에도 굴곡이 있었겠지만 20년 넘게 세계 PC 시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대만 업체들의 저력과 생존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글로벌 IT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대만의 마더보드 업체나 칩파운드리 업체를 방문하거나 마더보드 업종의 B/B율이나 파운드리 업체들의 공장 가동 현황을 예의 주시하는 게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이에 비해 국내 PC산업의 명성은 과거에 비해 쇠락한 것 아닌가 싶다.
그나마 여기서 그친다면 다행이다. 대만이 현재 국가적으로 추진중인 ‘雙星戰略(반도체·액정산업과 함께 바이오·SW산업을 각각 1조대만달러 이상 산업으로 육성 하는 전략)’은 우리 정부나 기업들이 21세기 먹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과 많이 중첩되어 있다. 벌써부터 LCD분야의 경우 대만이 우리를 추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걸 보면 지금 한창 잘 나간다는 산업도 혹시 PC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각 분야에서 시장점유율 1∼2위를 자랑하는 기업들이 이번 100대 기업에서 빠진 것도 무심코 지나칠 수 없다. 노키아가 시장점유율 하락과 제품 전략의 실패로 98년 이후 처음으로 100대 기업 명단에서 빠지는 수모를 겪었는가 하면 버라이존은 케이블사업자·AT&T·보니지 등과의 경쟁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고, AT&T와이어리스는 1분기에 37만명에 달하는 가입자가 유출되며 성장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시게이트·아마존닷컴·인터랙티브코프 등도 줄줄이 낙마했다.
문제는 우리 기업이다. 디지털 컨버전스로 대변되는 정보화 시대에선 과거와 현재의 명성이란 한순간 물거품이 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MIT 미디어랩의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거대 기업들은 자신들이 현재 확보하고 있는 고객 기반을 넘어 세상을 통찰하지 못한다. 대부분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작은 기업에서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뼈아픈 지적을 하고 있다.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국내 기업들이 한번쯤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온전히 생존하기 위해.
<장길수 국제기획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