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경제를 호령했던 종합상사와 지금 한국의 IT산업을 이끌고 있는 시스템통합(SI)업체 사이에는 공통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대부분이 그룹계열사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그룹 중 종합상사나 SI기업을 거느리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과거에는 전체 그룹계열사의 수출이 그룹계열의 종합상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누가 국내 최대의 매출기업인가를 둘러싸고 매년 삼성물산과 현대종합상사는 그룹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지금 SI사업을 전개하는 기업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SI기업의 매출순위는 그룹의 매출순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최고의 인재집단이라는 것도 종합상사와 SI기업 간 유사한 점이다. 종합상사들은 007 가방을 들고 세계를 누비는 성공적인 샐러리맨의 모습으로 항상 취업 1순위의 직장이었다. 잘 나갈 때의 종합상사처럼 SI업체들의 지금 상황도 비슷하다. 전체 직원의 80% 이상이 대학졸업 이상이며 취업희망직종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룹계열사들을 글로벌기업으로 도약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1등 공신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공통점이다. 종합상사는 수출을 통해, SI업체는 IT를 통해 그룹계열사들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과거 한국이 수출입국으로, 지금은 IT강국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명함을 내밀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종합상사와 SI업체들이다.
이처럼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종합상사의 위용을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중소기업들조차도 자체적으로 해외유통망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종합상사의 해외네트워크는 가치를 상실했다. 종합상사 최대의 자산이었던 인재들도 둥지를 떠나 벤처나 IT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을 전세계에 심는다는 자부심만으로 세계를 휘젓던 정열도 사라졌다. 지금은 자구를 위해 해외법인을 청산하거나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여야 하는 형편이다. 매출과 수익을 위해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주유소나 초밥집, 맥주집 등 종합상사의 명함을 내밀기가 쑥스러운 사업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파란만장한 종합상사의 과거는 이제 SI기업들에 현실이 되고 있다. 그룹계열사 물량만 갖고 사업을 영위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다. 다다익선이라고 과거에는 5억원, 10억원짜리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중소기업들과의 출혈경쟁도 불사했지만 지금은 법으로 묶여 입찰에도 참가할 수 없게 됐다. 출혈경쟁으로 수주를 했지만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협력업체들의 허리를 더 옥죌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경쟁업체와 차별화할 수 있는 기술이나 솔루션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아직까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외국 전문업체들이 공세를 취할 경우 우리 SI기업들이 설 자리는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단순 시스템 구축 또는 관리 등의 분야 외에는 없다. 요즘 SI기업들에서는 과거 종합상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손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SI산업이 자취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다는 것은 문제다. 정보화시대에 우리의 IT경쟁력이 그만큼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부터라도 SI기업들 스스로 남보다 앞선 기획력과 창의력으로 차세대성장산업을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력과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한 영업력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정보화시대에 SI는 국력이기 때문이다. SI산업이 종합상사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결과는 반드시 달라야 하는 첫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양승욱 컴퓨터산업부장 swyang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