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통합 미디어 시대다. TV와 오디오가 컴퓨터에 흡수되고 그 컴퓨터가 다시 네트워크에 편입된 게 엊그제다. 책상 위의 컴퓨터가 무선을 지향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손바닥 속의 휴대폰이 컴퓨터를 지향하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뉴스·오락·교육과 같은 콘텐츠의 영역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뉴스가 오락이며, 오락이 교육이 되고, 다시 전혀 다른 정보로 생성돼 가는 선순환고리로서 콘텐츠 개념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통합미디어는 멀티미디어라는 말이 컨버전스 현상으로 대체되고 그 컨버전스가 다시 확장돼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컨버전스를 구현할 포괄적인 매체가 통합미디어인 셈이다. 이런 흐름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른바 ‘C3+E’다. C3는 통신(Communication), 제어(Control), 연계(Connection)를 의미하고 E는 오락(Entertainment)을 뜻한다. 여기서 오락은 뉴스·교육 등이 포함된 큰 틀의 콘텐츠를 의미할 터다.
전세계 IT기업들의 목표도 이제 어떤 ‘입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C3+E를 구현할 것인가로 모이고 있다. 실제로 IT업계는 수년 전부터 이런 흐름을 염두에 두고 재편에 재편을 거듭해 왔다. 컴팩과 같은 거대기업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거나 IBM을 위협하던 애플이 디지털서비스로 방향을 튼 것 등이 좋은 예다.
시장을 호령하던 리더기업이 통합미디어 환경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에 고객이나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가령 삼성은 앞으로도 휴대폰이나 반도체를 공급하는 것만으로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인텔과 소니 역시 리더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최근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차세대 투자계획은 주목할 만한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다. 오는 2010년까지 200억달러(24조원)를 통합미디어 분야 연구에 쏟아 붙겠다는 게 그 요지다. 이 엄청난 돈을 들여 ‘C3+E’를 구현할 새 솔루션과 서비스를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 돈의 규모는 같은 기간 마이크로소프트가 투자할 총 연구개발비의 절반에 해당된다고 한다. 현재의 주력상품인 운용체계와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의 사업비중을 조만간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는 각오가 아닌 이상 나오긴 힘든 결정이다.
NEC·마쓰시타·도시바와 같은 일본 기업들이 유비쿼터스컴퓨팅 환경 구현이라는 이름아래 대규모 중장기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IT산업의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겼던 일본 기업들로서는 새로운 질서가 지배할 통합미디어시대에 대한 대비책에 목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IT기업들은 통합미디어시대에 얼마나 대응하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투자자나 고객들이 답답할 지경으로 감감 무소식이다. 게다가 요즘은 실적을 발표하는 어닝 시즌이라지만 어느 곳에서도 ‘이러이러한 실적을 토대로 저러저러한 통합미디어 전략을 세웠다’라는 발표가 없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저마다 다양한 전략을 준비하고 있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아직 없다’가 공식적인 대답이다.
IT산업에서 이제 통합미디어는 대세다. 투자자나 고객들에게 하루빨리 투명하고도 멋진 중장기 비전을 보여주는 것은 IT기업들의 미래와 신뢰도에 직결되는 문제다. 이런 단안은 또한 국가적으로도 오랜 타성에 젖어 방향성 상실의 위기에까지 몰린 ‘IT강국’이니 ‘인터넷강국’이니 하는 미명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서현진 디지털문화부장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