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디지털 컨버전스 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디지털 컨버전스 전쟁은 가정에서 먼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됐다. 디지털TV와 멀티미디어PC 둘 중 누가 진정한 안방의 주인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텔과 MS로 대표되는 윈텔 진영과 소니와 삼성을 필두로 하는 가전 진영 간 싸움은 말 그대로 예측불허일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컴퓨터와 가전왕국 간의 전선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본게임의 불꽃이 타올랐다. 가정이 아닌 길거리에서다.
길거리 제품의 원조는 단연 휴대형 오디오, 일명 워크맨이었다. 워크맨은 가정과 사무실을 벗어나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영토를 개척하며 소니를 일약 ‘전자왕국’으로 올려 놓았다. 워크맨은 80년대를 풍미한 후 CD플레이어로 맥을 이어 갔다.
그러나 휴대 가전의 지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90년대 중반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디지털 이동통신 바람으로 휴대폰에 권좌를 내주어야 했다. 소니, 마쓰시타, 산요로 대변되던 가전 트리오는 노키아, 모토로라, 삼성이라는 통신 트리오에게 힘없이 무너졌다.
가전의 뒤를 이어 길거리를 지배하려던 컴퓨터 진영의 개인정보단말기(PDA)는 힘 한번 제대로 못 쓰고 휴대폰에 정복당해 버렸다. 휴대폰의 위세에 눌려 PDA폰으로 변신하며 휴대폰 진영에 복속된 것이다.
통신에 패한 가전과 컴퓨터 진영은 서로 연합해 디지털카메라와 MP3플레이어로 만회에 나섰다. 컴퓨터 기술이 접목된 휴대형 카메라와 오디오는 때마침 불어닥친 인터넷 붐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휴대폰에 버금가는 영토와 힘을 되찾았다.
휴대폰 진영이 가만 놔둘리 없다. PDA를 쉬이 복속시켰던 그들이었다. 디카폰, MP3폰으로 새로운 정벌이 시작됐다. 점령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전과 컴퓨터 진영은 빼앗긴 영토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정면 충돌은 없는 듯 보였다.
통신 진영이 먼저 진검승부를 신청했다. 통신 영역을 광대역으로 넓히며 이동방송과 인터넷 영토로까지 손을 뻗쳤다. 통신 진영은 DMB폰으로 기선 제압을 노렸다. 이동방송 수신까지 가능한 와이브로에서도 한발 앞서 나갔다.
정면 도전에 가전 진영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주무기인 오디오, 사진,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부대를 통합해 반격을 개시했다. MP3플레이어, 디카, 휴대형 TV를 결합한 휴대형 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가 그것이다. 한국의 MP3 돌풍의 주역은 하나 둘 PMP로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MP3 진영에 가담한 소니도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로 지원군을 보냈다. 닌텐도도 닌텐도DS 부대를 동원했다. PC 진영에선 애플이 아이팟 부대로 연합했다. MS와 리눅스계는 OS라는 병참부대로 지원에 나섰다.
방송과 통신이 결합되는 새로운 컨버전스 영토에서만큼은 두 세력의 싸움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휴대폰은 이동전화와 멀티미디어, 방송, 인터넷까지 제공하는 편의성이 강점이지만 화면이 적은 단점을 버릴 수 없다. PMP는 비록 이동전화가 안 되지만 화면이 크고 PC에 버금가는 고성능을 겸비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조만간 펼쳐질 이 전쟁의 묘미에 가슴이 설렌다. 이번 전쟁은 바로 대한민국이 최일선 접전 지역이다. 광대역 통신과 최첨단 멀티미디어기기 모두 한국이 가장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생생한 전투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손해볼 게 없다. 휴대폰 진영이 승리하든, PMP 진영이 이기든 어느 쪽이나 최대 수혜국은 바로 우리나라다.
휴대폰, 특히 DMB폰이나 와이브로폰은 우리나라가 가장 높은 경쟁력을 지녔다. 레인콤을 필두로 우리나라의 많은 벤처업체가 PMP 진영을 이끌고 있다.
굿이나 보고 떡만 먹으면 그만이다. 이게 바로 길거리 삼국지를 지켜보는 묘미다. <유성호 디지털산업부장 shy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