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국회 회의실에서 열린 ‘방송법관계법’과 관련한 공청회장. 방송법을 만들고, 바꾸는 문화관광위원회 주최로 열린 행사인지라 정책 당국은 물론 방송과 통신업계 관계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울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참석치 못한 관계자들은 국회방송 생중계를 지켜봤다.
그러나 전공 교수들의 발표와 의원들과의 질의 응답이 나올 때마다 방청석과 TV수상기 앞에선 긴 한숨이 이어졌다. 발표 내용이 업계 현실과 너무 거리가 먼 데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내용이 적지 않았으며, 의원들도 이에 맞장구를 치거나 ‘생뚱맞은’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다.
한 정책 당국자는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몇년 전 자료를 갖고 발표하는 교수와 이런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는 의원들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 방송정책의 현주소”라면서 “정책 당국자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지 의문스럽다”라고 말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시대를 뒷받침할 전문가가 태부족이다. ‘내로라’ 하는 전문가는 적지 않지만 통신이든 방송이든 한쪽에만 치우쳐 ‘숲’을 제대로 못 본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카테고리로 한 몸뚱이인 선진국과 달리 두 분야가 오랜 동안 따로 커온 결과다. 전문가 의견이 부실하니 덩달아 정책도 부실해진다.
그나마 있는 전문가들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인터넷망을 이용한 방송서비스인 IPTV를 놓고 방송과 통신업계가 한창 시끄러웠다. 방송위와 정통부는 각각 방송과 통신으로 개념을 규정해 대립했으며, 급기야 국무조정실까지 조율에 나섰다.
외국 사례를 무조건 따를 것은 아니지만 IPTV엔 외국이 선진국이니 참조해볼 만하다. IPTV를 통신망을 이용한 방송서비스로 규정한 ‘전기통신역무이용방송법’을 통해 등록만 하면 서비스하도록 한 일본 사례를 특히 고려할 만하다. 정통부는 이를 등록만으로 서비스하도록 한 규제 완화와 네트워크는 전기통신사업법, 서비스는 전기통신역무이용방송법, 콘텐츠는 방송법(내용심의)으로 규제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전기통신역무이용방송법’이 분명히 방송법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과 일본의 규제 완화가 경쟁매체인 케이블TV에도 동등하게 적용한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정통부는 업계와 산하 연구기관 등에 통신방송 전문가가 상대적으로 많은 부처다. 이 전문가들이 일본의 IPTV 규제 정책을 몰랐다든지, 잘못 봤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정통부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확대 해석했다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도 문제다. 최근 방송·통신 융합에 대한 보고서 및 연구 결과 발표와 세미나,토론회,포럼 등이 봇물을 이루지만 전문가들은 상위 기관과 이해 관계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일쑤다.
이해관계자들도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문가들을 ‘포섭’하는 게 급급한다. 이렇다 보니 이들의 연구 결과에 대한 건강한 논쟁은커녕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안된다. 우리 정책과 산업이 나아갈 바를 적확히 제시하는 것은 아주 ‘먼 산’이다.
방송위는 최근 지상파DMB 사업자 선정을 위한 심사위원회를 어렵사리 구성했다. 구성 할때도 그랬지만 선정 결과 발표 이후의 후유증도 걱정스럽다. 방송위 한 관계자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맡을 외부 전문가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정말 몰랐다”라며, “사업자 선정 이후 심사위원이 공개됐을 때 혹시 문제가 되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신화수·유병수기자@전자신문, hsshin·bjorn@
◆전문가 풀을 만들자
국무조정실은 이달초 대통령의 공약인 방송·통신 통합기구 설치를 위한 전담팀을 구성했다. 전담팀에 실무자를 파견한 방송위,정통부,문화부는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논리 싸움에 대비했다.
주로 연관 연구기관을 활용했다. 방송위는 자체 방송연구센터를, 정통부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를, 문화부는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를 적극 활용중이다. 각 기관의 연구용역을 맡는 교수들까지 동원한다.
방송·통신을 망라하는 전문가들이 태부족한 상황에서 그나마 최고의 전문가들을 끌어모은 셈이다.
그런데 이해 관계가 달라 서로 전문가를 공유하지 않는다.
해당 연구원이나 교수들도 이해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소신을 밝히면 해당 기관과의 인연을 끊어야 할 위험성을 안고 있어 늘 조심스럽다.
최근 미디어미래연구소를 차려 독립한 김국진 전 KISDI 박사는 어떤 기관 산하로 들어갈까 고민했다가 문화부를 가닥을 잡았다. 방송위나 정통부 보다 상대적으로 이해 관계가 적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문화부가 국무조정실의 TF에 참여하면서 방송위나 정통부의 견제를 받게 됐다고 한다. 김 소장은 정부기관과 좋지 않은 관계가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는 지 잘 알고 있어 당분간 정부의 연구 용역을 맡지 않기로 했지만 아쉬움이 크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전문가군에게 연구용역을 맡길 때 연구자의 능력이나 그간의 실적을 보고 선택하기 보다는 그 연구자가 어느 기관과 또는 어떤 이해집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의도한 만큼의 연구 결과를 내놓을 지 먼저 검토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세 부처가 방송·통신의 전문가를 끌어모았다면 이젠 대의를 위해 ‘전문가 풀(Pool)’을 만들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신화수기자@전자신문, hsshin@
◆독립적인 연구기관도 절실
방송·통신 융합이 두 분야를 넘어 IT산업과 우리 경제 전반의 중요 화두로 떠올랐지만 이를 한데 아우르면서 독립적으로 연구할 기관은 없다.
정보통신부는 통신과 관련한 연구기관을 다수 거느렸지만 충분한 연구를 선행하지 않은 정책 결정이 적지 않다는 비판을 곧잘 받는다. 연구 결과를 거쳐 정책 방향을 잡기 보다는 방향을 먼저 정해놓고 접근한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방송위원회는 산하 연구기관이 전혀 없으며 1년전에 내부에 소규모 연구센터를 조직했다. 방송위가 처음으로 자체 연구센터를 보유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 연구센터 역시 방송위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 논리를 개발하는 게 주 목적이다. 그나마 지원 예산도 적어 국가 방송정책을 담당한다는 방송위의 위상에 절대적으로 미흡하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은 유일한 방송 정책 및 지원 관련 연구기관이다. 하지만 문화부 산하여서 정작 방송정책을 담당하는 방송위와는 연구 교류가 드물다. 진흥원의 연구실적도 방송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못한다.
이처럼 방송 통신 융합에 대해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정부 연구기관이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심지어 케이블TV 업계는 자체적으로 한국케이블연구원(K랩스)을 설립,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변변한 연구기관 하나 없다.
통신방송 융합의 중요성이 커진 만큼 독립적인 연구기관이 절실하다. 여러 연구기관의 통방 관련 조직을 통폐합해 독립화하는, 그 전 단계로 상호 정보와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체계를 만들든 연구의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날로 증대됐다.
유병수기자@전자신문, bjorn@
◆통방 융합 연구 현황
방송·통신 융합과 관련한 연구의 축은 크게 셋이다. 하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정보통신정챙연구원(KISDI)·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등 정부 연구기관이다. 또다른 축은 대학과 학회 등 학계다. 여기에 업계 부설 연구소와 협단체 등 업계가 있다.
정책과 관련해 정부 연구기관은 전문성과 함께 파워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상위 정부부처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 치우쳐 연구가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학계는 각 대학 부설 연구센터의 자체 연구와 함께 한국방송학회·한국방송공학회·정보법학회,통신학회 등이 최근 방송·통신 융합을 주제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아카데믹한 연구에 치우친 게 한계이지만 최근 통신을 이해하는 커뮤니케이션 소장파 학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상아탑을 벗어나고 있다.
업계쪽에는 통신사업자나 운영하는 경영연구소와 케이블TV업계의 한국케이블연구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연구소는 최신 기술과 문화 흐름을 가장 잘 꿰고 있지만 해당 업체의 이익을 대변해야 해 정책에는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정부부처들도 최근 정책 연구 기능을 강화했다. 방송위는 연구센터를, 정통부는 통방융합전략기획팀을 운영한다.
하지만 인원도 소수인데다 전문 연구기관의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한 정책 개발 및 대응에 치우쳐 연구 수준이라 할 수 없다.
각 연구기관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갈등을 벌이기도 하지만 최근 상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졌다. 학회를 주축으로 전문가토론회, 세미나, 포럼, 컨퍼런스 등이 한달에도 몇차례 열리고 산·학·연 및 정부부처 관계자가 두루 참석해 의견을 교환한다.
방통·통신 융합의 가속화가 자발적인 연구 통합을 촉발시키는 셈이다.
유병수기자@전자신문, bj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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