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중기청장이라는 자리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대책회의에 참석한 대·중소기업 대표들에게 한 말이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고 시장에서의 여러 경쟁과 협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는 취지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시장은 정책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된다. 지난 수년간 중소기업 정책의 면면과 시장의 반응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역대 중소기업청장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만의 독특한 정책으로 중소기업 지원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지난 99년부터 약 2년간 재임했던 한준호 현 한국전력사장은 소상공인 창업 지원, 벤처의 내실있는 성장 기반 조성을 내세웠다. IMF 사태로 기죽었던 국민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불어넣어 벤처열기로 승화됐다.

 이어 2001년부터 약 10개월 동안 최동규 청장(현 강원발전연구원장)이 바톤을 이어받았다. 최 청장은 당시 중소기업의 IT화 밑그림과 함께 중소기업 정보화를 통한 중소기업 생산성 향상 및 효율화에 전력했다. 중소기업용 전사자원관리(ERP) SW 보급이 확산되면서 뜨는 SW기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무역협회 부회장으로 활동중인 이석영 청장은 2002년부터 약 1년1개월간 재직했다. 그는 중소기업의 인력난 해소와 제조물 책임(PL) 대응이라는 지상과제를 떠맡았다.

 후임 유창무 청장(현 KTNET 사장)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 수립과 함께 단체수의계약제도를 경쟁제도로 바꾸는 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의 반발에 시달려야 했다. 2003년부터 약 1년4개월동안 중소기업 정책 담당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곤욕을 치렀다.

 지난해 7월부터 지금까지 중기청의 수장을 맡고 있는 김성진 청장은 벤처활성화 종합대책과 이를 뒷받침할 모태펀드 관리기관 선정 그리고 혁신형 중소기업 육성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

 지난 수년간 중기청장들의 정책을 보면 어느 하나 쉽게 넘어간 일이 없다. 잘되면 잘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중소기업인과 언론의 표적이 됐다. 이 때문에 중기청장 자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표가 나지 않는 기관장직’으로도 유명하다. 다른 외청 기관이 정책 집행만 하면 되는 데 비해 중기청은 정책 수립까지 하는 이중의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참석할 회의 역시 한둘이 아니다. 차관회의, 국정현안조정회의, 경제정책조정회의, 당정회의는 물론이고 기타 경제부처 장관회의까지 두루 참석해야 한다. 최근 만났던 모 전임 중기청장은 “정말 힘들지요”라는 말로 중기청의 어려움을 요약했지만 그 말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만큼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어머니 격인 산업자원부 그리고 재정경제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데다 ‘고생한 사람 따로, 정책 발표하는 사람 따로’라 생색도 나지 않는다. 개각이 단행돼도 장·차관 영전 사례를 찾기 힘들다. 한준호 전임 청장이 장관급인 중기특위 위원장으로 발탁돼 얼굴을 세웠을 뿐이다. 제3자들도 중기청장직에 대해 ‘웬만하면 피해 가고픈 고달픈 기관장직’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하반기 이후 다시 벤처 만들기에 나선 김성진 청장의 노력과 향후 성과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중기청 내부의 혁신적인 조직 개편을 마무리하고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는 대·중소기업 협력 사업의 일환인 펀드 및 재단 구성, 1조원 모태펀드, 벤처확인제 등 굵직굵직한 사안을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말처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정책은 여전히 시장의 구심점으로 남아 있다. 김 청장이 현직을 마치면 어디로 가고 싶어 할지도 궁금해진다. 이재구 경제과학부장@전자신문, jk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