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보이는 손,보이지 않는 손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정말 묘하다. 둘 다 사람과 사회, 제도를 이해하는 동양 고대 철학의 양대 축이다. 추구하는 것은 하나지만 출발점은 다르다.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이나 궁극적인 목표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방법은 다르다. 사람을 이해하는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맹자는 사람은 덕성(德性)으로 높일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다고 보았다. 천부적인 덕성을 높이는 걸 정치의 근본으로 보았다. 요순 시절을 대표적인 이상향으로 꼽고 있는 유교사상의 기본철학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순자의 성악설은 사람을 욕망의 덩어리로 보았다. 욕망에는 선의라는 게 없다. 그래서 성악설은 권력으로 욕망을 규제해야만 올바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법가에 계승돼 법치주의를 낳았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오늘날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로 계승됐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법치주의를 통한 자유주의 방법론으로 발전했다.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자유를 해칠 수 있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규제한다는 방식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완전하지 않듯 법치주의를 통한 자유주의 역시 완벽하지 않다. 어디까지가 자유의 한도인지, 어디까지가 최소한의 규제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이 같은 논란이 자주 불거지고 있다. 경제 분야의 주체는 자연인이 아니라 법인(기업)이어서 더욱 그렇다. 사람과 달리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이윤 창출에 있다. 이윤 창출은 그 자체가 결코 선도 악도 아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비무장지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기업의 이윤 창출을 선으로 보았다. 국가가 부강해야 국민이 행복해진다는 논리에서다. 특히 그는 이 과정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고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자연의 이치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공황이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 주체의 욕망에 의해 생겨나는 질서라는 것이다. 성악설의 논리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하지 말고 정부가 일정부분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수정주의가 태동했다. 다시 한 번 경제 주체들에 대한 규제와 감시가 강화됐다.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한 정부의 개입도 늘어났다.

 그런데 최근에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 때문에 논란이 일고 있다. 정경 유착이 바로 그것이다. X파일에서 드러난 삼성의 전방위 로비의혹은 정부규제의 실효성을 의심케 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더드가 강조되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란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대신해 온 ‘보이는 손’이 투명해져야 한다는 논리다.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못 되지만 ‘보이는 손’ 또한 완전한 대안은 못 된다는 얘기다. 글로벌 스탠더드란 ‘보이지 않는 손’의 대안인 ‘보이는 손’의 또 다른 대안인 셈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욕망이라는 성악설에 기인한다면 투명해진 보이는 손 또한 성악설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여기서 의문에 든다. 어떻게 투명해질 수 있을까다. 최소한의 규제를 최대한의 규제로 바꾸면 과연 가능할까.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는 아니다. 규제만능주의는 실패한 지 오래다. 또한 최소한의 규제가 오늘날의 대세다.

 규제 이전에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선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잘못된 욕망이 아니라 선한 욕망에 의해 움직여질 수 있도록 하는 길이다. 이상론 같지만 결국은 교육이다. 우리의 인성이다.

 디지털산업부·유성호 부장@전자신문, sh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