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통신시장은 건강하지 못하다. 전례 없는 체질약화에 시달리고 있다. 첨단 IT 서비스 투자와 신규 수요 창출로 국내 경제를 이끌어 왔던 지난 수년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최근엔 악순환의 조짐도 엿보인다. 유무선 통신사업자 모두 소모성 마케팅 비용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성장은 거의 없다. 투자는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돼버렸다. 신규 서비스를 통한 외형 확대가 어렵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신규서비스 시장을 창출하지 못하면 현재로선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통신시장의 모습은 국내 경제의 장기불황에 대한 걱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우려스럽다. 더 늦기 전에 통신사업자들이 스스로 활력을 찾아야 한다. 지금 실기(失機)하면 어쩌면 5년, 10년 뒤 회복불능의 우리 경제를 볼지도 모른다.
해법은 간단하다. 정체된 포화시장의 에너지를 신규시장 쪽으로 흐르게 해주면 된다. 유선과 무선, 통신과 방송이 결합하고 융합(컨버전스)해서 만들어내는 시장 창출 가능성은 무한하다. 앞으로 터져나올 신규서비스의 잠재력은 이제 눈에 보이는 DMB나 IPTV의 파괴력, 그 이상이다.
문제는 사방에 쳐놓은 규제의 그물이다. 원천적으로 신규 융합·결합시장의 테스트베드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규제정책이 계속되는 한 기업들에 ‘투자 활성화’는 대답 없는 메아리다. 브로드밴드 이후 새로운 방송·통신 융합서비스 시장과 관련 콘텐츠 산업을 촉발할 서비스는 아직 눈에 안 보인다. IPTV나 지상파DMB의 보급 움직임도 여전히 발이 묶여 있는 상태다.
통신시장의 돌파구를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경직된 기업 인수합병(M&A) 분위기다. 어차피 제한된 국내 시장에서 사업자들 스스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투자도 안 되고 사업자들끼리 서로 발목 잡는 상황만 반복될 뿐이다. 지금처럼 좁은 시장에서 이즈고잉(is-going)식의 전략은 통신사업자들의 글로벌 경쟁력도 깎아 먹는다.
이미 미국에서는 유선이냐 무선이냐, 통신사업자냐 방송사업자냐는 구분마저 사라졌다. 우리처럼 서로 땅에 선 그려놓고 쓸데없이 눈치보는 일이 없다. M&A를 통해 몸집을 불린 SBC·버라이즌이나 최대 규모의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를 보유한 케이블사업자 컴캐스트는 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네트워크’ 제공업체일 뿐이다. 이처럼 M&A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거대 사업자가 등장하는 데는 연방통신위원회(FCC)가 큰 역할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규제최소화 원칙을 앞세운 정책 덕분이다. 자생적인 시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사업자들에게 확실한 동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통신 규제정책의 향배건, 시장 구조조정 방안이건 분명한게 없다. 그저 답답한 예측 불가능의 상황만이 이어질 뿐이다. LG그룹 오너의 이례적 행보로 촉발됐던 2강, 3강 구도설만 봐도 그렇다. 연일 화려한 입방아들만 난무했을 뿐 내용은 없었다. 덕분에 괜스레 주식시장만 출렁거렸다. 데이콤과 하나로텔레콤의 주가가 연일 춤췄다. 인수자로 지목된 대형 통신업체의 주가까지 덩달아 올랐다. 국내 사업자나 시장 전체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외자 등 일부 이해세력의 돈 장사만 도와줄 뿐이라는 걱정이 벌써부터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이다. 모두 다 M&A를 둘러싼 우리 통신시장의 체질이 건강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다.
더는 통신·방송 환경을 둘러싼 민감한 규제 이슈와 구조조정 논의를 미루지 말자. IT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국가산업을 위하고 기업의 체질을 강화하자는데 뭐가 그리 두려운가. 지금으로선 그 무엇보다 때를 놓치는 것이 가장 겁나는 문제다.
김경묵부국장@전자신문, k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