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방수사국(FBI)은 감청기술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G-me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연방수사관들이 테러리스트나 흉악범들의 유선전화나 휴대폰을 감청해 범인을 검거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아주 익숙한 장면이다.
FBI 요원들이 별 죄책감 없이, 아니 오히려 자부심을 갖고 범죄자들이나 테러리스트의 통신을 합법적으로 감청하는 것은 지난 94년 제정된 CALEA(The Communications Assistance for Law Enforcement Act:법집행을 위한 통신지원) 법 때문이다.
이 법에 따라 FBI 요원들은 통신사업자들의 설비에 감청 장비를 부착,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들의 통화를 엿들을 수 있다. 통신사업자들은 FBI의 감청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청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통신시스템도 재구성해 줘야 한다. ‘수사상 편의’라고는 하지만 자사 통신망에 감청 장비를 들이대는 것을 용인하고 지원해야 하는 마음이 오죽할까. 감청에 무방비 상태인 가입자들을 계속 설득하는 일도 부담스럽다.
아무튼 CALEA법에 따라 지난 10년간 FBI는 유선전화사업자와 이동통신사업자들의 망에 감청 장비를 설치, 수사에 활용해 왔다. 물론 CALEA법의 수혜자가 FBI만은 아니다. CIA·마약단속국(DEA) 등도 범죄자의 통신 내용을 마음 놓고 감청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지만 통신 서비스의 발달로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다. 인터넷 전화(VoIP)·초고속 인터넷서비스·와이파이·위성 통신·‘푸시 투 토크’ 방식 휴대전화·전력선 통신(PLC) 등 신규 서비스들이 봇물을 이룬다. 가히 ‘통신의 백화제방 시대’라 할 만하다.
문제는 CALEA법이 통신서비스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 제정 당시 케이블 모뎀 서비스를 ‘통신 서비스’가 아니라 ‘정보서비스’로 분류해 감청 대상에서 제외한 것과 비교하면 완전 딴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FBI의 감청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신규 통신 서비스를 감청 대상에 포함하지 않고선 CALEA법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없다는 게 FBI의 일관된 주장이다. FBI는 그동안 연방통신위원회(FCC)와 의회 등 기관에 우선 인터넷 전화부터라도 감청대상에 포함할 것을 끈덕지게 요구했다. 이에 관한 한 법무부, 국토안보부, DEA, 경찰 등 정부 기관도 FBI와 한 통속이다.
9·11 테러 이후 인터넷 전화가 범죄자들이나 테러리스트들의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정부 기관의 이 같은 논리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제공중인 ISP들은 국가 기관의 통제가 영 달갑지 않다. 인권 유린이니 사생활 침해니 하는 반론을 펴보지만 국가안보와 치안유지라는 대의명분 앞에 군색하기만 하다.
다른 서비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작년 미국 일부 통신 사업자들이 항공기내 휴대폰 서비스의 도입을 추진했다. 물론 FCC도 이를 검토했다. 그러나 FBI 측은 전파교란과 범죄악용을 우려해 항공기 내 휴대폰 서비스에 반대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휴대폰을 통해 원격지에서 기폭장치를 작동시키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에서 기내 휴대폰 사용은 희망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 허용되더라도 감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지난 주 FCC는 신규 통신 서비스의 감청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했다. 미국 내 인터넷전화(VoIP) 사업자들과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들이 18개월 안에 FBI·DEA 등 정부 기관이 합법적으로 감청할 수 있게 시스템을 강구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번 FCC의 결정으로 FBI는 다른 신규 서비스도 감청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역설적이지만 인터넷 전화사업자들은 FCC의 조치로 CALEA법상 정식 ‘통신사업자’로 공인받은 셈이다.
이번 FCC의 결정은 FBI와의 싸움에서 통신 사업자들은 그냥 ‘객체’일 뿐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줬다.
◆장길수 국제기획부 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