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디지털 명가의 조건

 휴대폰이나 반도체에 빛이 가려 있지만 한국산 가전제품은 전세계 각지에서 넘버원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물론 한국 가전산업의 맨 앞에는 예외없이 삼성전자나 LG전자가 자리하고 있지만 웅진코웨이나 유닉스전자, 쿠쿠홈시스 등 중견 전문업체들의 힘은 우리나라 가전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차세대 영상기기의 꽃이라 불리는 디지털TV 시장에는 10여개의 전문업체가 언젠가 글로벌브랜드로 우뚝 선 자기의 모습을 그리며, 디지털 코리아의 수출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 전문업체가 지난해 수출한 디지털TV는 10억달러 규모에 육박한다.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한 해 물량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결코 만만한 물량이 아니다. 그들이 삼성전자나 LG전자 못지않은 관심과 지원의 대상이 돼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첨단 디지털TV를 업체마다 1억달러 가까이 수출하고 있는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전문업체들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속앓이를 계속하고 있다. 대만은 물론이고 터키를 비롯한 유럽의 TV업체들과의 가격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TV 가격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패널을 생산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원인 제공자다. 세계 최대 패널 생산국가는 우리나라다. 그런데 패널 생산업체들이 외국 기업에는 싸게, 국내 업체에는 비싸게 공급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이들 전문업체의 주장이다. 대만이나 유럽 등의 기업들은 컨소시엄을 형성, 공동구매를 통해 낮은 가격으로 패널을 구입하지만 정작 국내 업체들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불만이 있지만 패널 생산업체들에 가격을 인하해 달라고 요구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미운털이라도 박히면 기존 물량마저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거래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갑을관계가 이 시장에서만큼은 오히려 역전돼 사면서 눈치를 봐야 하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수 있을 것인지, 전문업체들 간 눈치 보기가 한창이다.

 현재 디지털TV 전문업체들은 위기에 내몰려 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패널 구입난, 업체들 간 과당경쟁, 여기에 대부분 OEM에 의존하고 있는 사업구조가 어려움을 한층 가중하고 있다. 우리나라 디지털TV의 수출을 견인해 온 한 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패널뿐 아니라 디지털TV 완제품을 생산하는 삼성전자나 LG전자에도 결코 유리한 일이 아니다. 전문업체 대부분이 내수보다는 수출에 주력하고 있으며, 타깃 또한 대기업의 주력 시장이 아닌 저가 시장이기 때문이다.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는 중국산이나 대만산의 공략을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결과적으로 전문업체들이 브랜드를 갖추고 생존할 수 있도록 오히려 대기업들이 패널을 저가로 공급하고, 개발 및 생산기술은 물론이고 세계 시장에서 판매가 확대되도록 마케팅을 공동으로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육성책이 필요하다.

 아날로그 시대에 일본이 전자왕국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소니나 마쓰시타라는 거함과 함께 샤프와 산요 등 전문업체들이 선단을 이루고 세계 시장에 진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디지털 시대의 명가로 대한민국이 우뚝 서기 위해서는 삼성과 LG 외에 새로운 전문브랜드가 여럿 나와야 한다. 혼자의 힘만으로 세계 시장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너무 외롭고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양승욱부장@전자신문, sw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