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멸종 위기에 처한 CP

 바다가 있다. 물빛이 푸르고 플랑크톤이 풍부한 블루오션이다. 바다의 신사 펭귄이 빠른 날갯짓을 치며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다. 일순간 흰 이빨을 드러낸 바다표범이 팽귄을 낚아챘다. 펭귄을 포식한 바다 표범이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며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는 순간 무게가 10톤이나 나가는 범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해양 도큐멘터리에서 봄 직한 장면이다.

 딱 맞아떨어지진 않겠지만 디지털콘텐츠 산업의 생태계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음악·게임 등 다양한 물고기가 풍부한 디지털콘텐츠는 말 그대로 블루오션이다. 원 소스를 유무선 인터넷이나 미디어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는 콘텐츠 프로바이더(CP)는 펭귄에 해당한다. 바다표범이 인터넷 포털이라면 SK텔레콤과 같은 통신 서비스업체는 범고래에 가깝다. 이런 가치 사슬로 엮인 디지털콘텐츠 생태계에 비상이 걸렸다. 펭귄에 해당하는 CP들이 서식지에서 내몰리고 있다.

 CP의 멸종 위협은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가장 먼저 감지됐다. 올 봄부터 인터넷 세상을 들썩이게 한 디지털 음악파일 저작권 분쟁은 CP 무용론으로 확대됐다. 음원 권리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음악 유통 시장에서 CP들이 컨버팅하는 역할 외에는 하는 게 없다”며 수익 배분을 줄이거나 아예 유선 포털과 직접 거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모바일 음악 분야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불거졌다. 음원 권리자들이 이동전화를 통한 음악 서비스의 저작권료를 CP가 아닌 이통사에서 직접 받겠다며 CP를 압박했다. 경우는 다르지만 음원권리자-CP-포털(또는 이통사)로 이어지는 가치 사슬에서 CP를 빼내 버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통사들은 아예 CP들을 내몰았다. 물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성인 콘텐츠 분야에서의 일이지만 SK텔레콤은 오는 10월 성인 콘텐츠 서비스를 중단할 계획이다. 업계는 KTF도 뒤를 이어 성인 콘텐츠 서비스를 중단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 여론과 법적 제재에 따른 것이지만 CP 처지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리게 됐다.

 조금 사정은 낫지만 모바일게임 업계도 위기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모바일 콘텐츠의 킬러 앱으로 모바일게임이 부각되면서 한때 400여곳에 달했던 업체가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0곳 정도로 줄었다. 그나마 사업체 유지를 위한 최소 연간 매출인 10억원을 넘는 업체는 20곳도 안 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업체는 사실상 헛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운데도 CP들은 비명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다. 다급해진 모바일 음악 CP 업체들은 최근 한국모바일음악산업협회를 발족시켜 힘을 모으고 있지만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통사를 상대로 우리 이익을 관철하기에는 이통사가 너무 거대하다. 정보통신부에 호소해도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문화관광부에 기대를 걸어 봤지만 우리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모바일 음악 CP 업체들은 갈 데도 없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고아나 마찬가지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업무 관할권을 두고 매번 다투는 정보통신부와 문화부가 한결같이 CP들을 외면하니 말이다. 더욱이 의아한 것은 문화부의 태도다. 정통부가 통신 서비스 업체나 포털 편을 들면 “역시 손은 안으로 굽는다”며 이해할 수 있지만 문화부마저 CP를 모른 체하는 것은 의외다. 위기감을 갖는 CP들에게 문화부가 손을 내밀면 디지털 콘텐츠 업무 영역 다툼에서 천군만마를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CP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고 생태계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단초가 된다면 정통부든지, 문화부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디지털문화부·이창희부장 changh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