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IT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와 LG전자라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고 있는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대폰이나 디지털TV, 반도체, LCD 등 첨단 디지털기기에서 삼성과 LG는 서로 앞선 기술을 과시하면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시장의 흐름을 주도해오고 있다. 그러나 경쟁이 산업발전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경쟁보다 협력이 우선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일 때가 대표적이다.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경쟁보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협력이 우선돼야 함은 당연하다.
최근 우리 기업이 단연 앞서 있다고 자부하는 LCD 분야에서 대만 경계론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세계 노트북PC 시장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세계적 생산기지인 대만은 이를 기반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세계 시장에서 우리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대만 기업들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자국 시장을 장악하면서 세계 LCD 시장에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경쟁에 앞서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는 이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이 최근 화두가 되고 있지만 LCD 시장에서만큼은 대기업과 대기업 간으로까지 상생이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LCD 시장에서 대기업과 대기업 간 상생은 기판의 표준화가 처음이자 끝이다. 최근 전 세계 LCD 업체들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기판의 크기를 결정해 투자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40인치와 46인치, LG필립스LCD(LPL)는 42인치와 47인치를 각각 내세워 양보 없는 규격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두 회사 모두 세를 불리기 위해 상대방이 아닌 대만 업체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급급한 상황이다. 제품 규격 싸움의 배경이 되는 세대별 투자가 6세대·7세대에 이어 8세대로 계속된다면 국내 업체 간의 ‘출혈경쟁’에 따라 대만 업체들이 ‘어부지리’를 얻는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삼성과 LG의 협력은 곧 세계 1, 2등 간의 협력이다.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우리 기업들이 만들어 간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에 따른 효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국제표준 주도권을 확고히 가져갈 수 있다는 것 외에도 개별 패널기업이 규격 경쟁에 실패함으로써 빚어질 수 있는 큰 위험을 없앨 수 있다. 장비·재료 등에 대한 투자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도 있다. 또 국내 장비 업체의 수직 계열화를 완화함으로써 국내 장비·부품기업을 육성할 수 있게 돼 완제품뿐 아니라 장비·소재 분야도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국내 대기업 간 협력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서로 당장 눈앞의 이익을 내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판 및 제품 크기 표준화가 이뤄지면 자사 경쟁력을 바탕으로 특정 규격을 디팩토 스탠더드(사실상 표준)로 키워 더 많은 과실을 딸 수 있는 조건을 포기해야 한다. 삼성전자나 LG전자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완제품 생산업체들의 눈치도 봐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실보다 득이 많다면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이제 세계 LCD 시장은 삼성과 LG의 싸움이 아니다. 뒤에서 바짝 추격해 오는 대만, 재기를 꿈꾸는 일본 등 국가 간 경쟁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LCD를 국가 전략산업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이들을 논의의 장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세계 LCD 시장 상황은 이제 우리에게 대기업과 대기업 간 상생이라는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양승욱부국장@전자신문, sw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