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위기 상황의 과학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은 왜 상황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는지에 대해 (프랑스인) 모두 눈을 감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진실에 눈을 감았다.”

 “프랑스는 한국경찰의 발표를 믿지 않았지만 한국 과학자와 경찰은 진실을 밝혀냈다.”(서래마을 영아살해 사건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논평)

내심 좀 불안하기는 했다. 한국 수사당국과 과학자들이 DNA 검사 등 과학적 수사기법을 동원해 살해된 영아의 부모가 프랑스인이라는 충격적인 수사 결과를 내놓았지만 프랑스의 과학수사시스템이 이를 확인해줄지 안달이 났던 것이다. 한국 과학자들은 99.9%의 확신으로 진실을 얘기했지만 프랑스 측 결론이 다르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분명 있었다.

문화적인 자부심과 관용 정신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프랑스인 처지에서야 오죽했으랴. 아시아의 변방, 한국의 과학자들이 내놓은 결론을 믿지 못하겠다는 집단의식이 작용했을 터다. 오만과 편견이 일순간 프랑스의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번 사건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는 과학 일반에서 전반적인 사회의 이해수준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과학이 정치 또는 사회적 이해관계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일깨워줬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잣대보다는 과학이라는 잣대가 사회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필수 덕목이라는 교훈도 얻는다.

 프랑스가 영아살해 사건으로 들끓고 있는 시점에 우리나라에서는 북한 핵 실험 사태가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았다. 이 사태는 한순간에 한국 사회의 합리적인 판단과 이성을 무력화할 파괴력을 간직한 사안이다.

 마침 국감철을 맞아 과학기술부와 출연연구기관이 정치권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지질자원연구원이 핵 실험의 진앙을 몇 차례 수정해 곤욕을 치렀으며 아리랑 2호 위성을 운용중인 항공우주연구원은 핵 실험 지역 위성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했냐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원자력 강국이라는 우리나라가 북한 핵 실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관측장비나 첨단 기술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냐는 성토 일색이다. 부랴부랴 정부는 북한 핵 실험에 따른 방사능 유출을 검사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제논탐지기를 긴급 공수하고 해명자료를 내놓느라 북새통을 떨었다.

 북한 핵 실험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정부나 출연연의 과학적인 검증시스템이나 위기대응 시스템은 취약함을 드러냈다. 한국의 과학이 프랑스에서 멸시를 받은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 과학시스템은 몰매를 맞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진정 국가 위기 상황에 처해 과학시스템이나 위기대응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나 되묻고 싶다. 차세대 성장동력이나 미래의 기술을 확보하는 데 많은 돈과 힘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중요한 국가 위기상황에 대한 과학부문의 투자는 미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제가 터지면 정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느라 정작 과학자들이 객관적인 사실을 도출하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제반여건과 숙려(熟慮)의 기간을 충분히 주었는지 의문스럽다.

 과학이 정파적인 또는 사회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초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과학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집단의식에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과학 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사회를 훨씬 건강하게 한다.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일에 정신을 팔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과학시스템이 국가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더욱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장길수 경제과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