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PC시대의 종언

“어떤 전자제품을 선물로 받고 싶으세요?”

 미국 소비자들은 지난달 미국소비가전협회(CEA)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다. 응답자들은 디지털카메라·DVD플레이어·휴대폰·MP3플레이어·비디오게임기 등을 꼽았다. 그런데 으레 나왔던 데스크톱PC를 말한 소비자는 거의 없었다. 너무 비싸서 그런가 했더니 아니었다. 더 비싼 노트북PC를 원한다는 응답자는 순위 앞쪽에 있었다.

 수십년간 세계 정보기술(IT) 패러다임이었던 PC의 위상이 흔들린다. 신제품이 나와도 소비자들은 좀처럼 눈길을 주는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 ‘윈도 비스타’가 나온다고 하니 조금 관심을 갖지만 예전같지 않다. 그런데 휴대폰이나 MP3플레이어, 게임기 등은 다르다. 커뮤니티 사이트엔 나오지도 않은 신제품을 갖고도 갑론을박이 치열하다.

 휴대기기에 관심을 빼앗긴 PC를 보면 마치 ‘첩에 밀려난 안방 마님’을 보는 듯하다.

 ‘PC시대의 종언’이라는 예언이 또 다시 흘러나온다. 90년대 말에도 나왔었다. 오라클이 네트워크컴퓨터를 내놓았을 때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PC를 버리지 않았다.

 이 예언은 인터넷이 확산되자 또 한번 나왔다.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 갔다. 인터넷 덕분에 PC는 더욱 성장했다. 단 한 대의 기계로 문서도 작성하고, 편지도 보내고, 동영상도 보는 것으론 PC만한 게 아직 없다.

 그런데 요즘 상황이 달라졌다. PC 없이 휴대폰 등으로 e메일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며, 메신저도 주고받기도 한다. PC를 켜지 않고도 인터넷전화를 걸며 동영상도 주고받는다.

 이런 걸 보고 “PC시대는 끝났다”고 외쳤더니 PC시대의 제왕 ‘윈텔’이 발끈했다. 빌 게이츠 MS 회장과 폴 오텔리니 인텔 CEO는 지난 5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공동 기고문 형태로 “이제 PC시대의 ‘1장’이 끝났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PC 시대는 끝났다’는 최근 WSJ 기사에 대한 반박이었다. 두 사람은 ‘각종 디지털기기의 허브로서 PC의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두 달 뒤 레이 오지 MS 소프트웨어설계책임자(CSO)가 “PC 시대가 끝나고 있다”고 말했다. 윈도를 통해 PC 시대를 이끈 MS에 ‘PC 시대의 종언’이라는 말은 금기어다. 그런데 MS에서, 그것도 빌 게이츠로부터 CSO를 물려받아 후계자 격인 레이 오지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는 “PC가 IT 세상에서 핵심 엔진 역할을 한 시대는 이제 역사가 됐다”면서 “지금까지 MS는 제품을 개발할 때 항상 PC를 중심에 뒀지만 이제 인터넷을 중심에 둬야 하는 시대를 산다”며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PC보다는 휴대폰 같은 휴대형 기기를 더 많이 쓸 날이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불과 몇 달도 안 돼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학사학자인 토머스 쿤이 제시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나 사고, 개념 등의 집합체다. 패러다임은 자연과학 위에서 혁명적으로 생겨나오며 발전했다가 새 패러다임에 의해 갑작스럽게 쇠퇴한다. 지금까지 IT 패러다임은 PC였지만 이제 모바일기기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패러다임을 만났다.

 패러다임 전환기에 IT업계가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시점을 잘 살펴야겠지만 새 패러다임에 맞게 준비하면 된다.

 과연 우리나라 IT 업계는 새 패러다임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을까. 혹시 옛 패러다임에 아직 빠져있는 건 아닐까. 옛 패러다임의 대표주자인 MS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게임기와 유무선 콘텐츠로 새 패러다임에 살짝 발을 걸쳐놓았는데 말이다.

◆신화수 U미디어팀장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