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에서 예상대로 민주당이 승리했습니다. 민주당이 12년 만에 하원의 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했으며 상원에서도 민주당 승리가 확실해 보입니다. ‘강한 미국’에 바탕을 둔 부시와 공화당의 세계 질서 재편에 미국민들이 등을 돌렸으며 부시는 럼스펠드를 즉각 해임했습니다. 럼스펠드는 부시 행정부 내에서 네오콘을 대표하는 인물이니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각국 정부와 기업, 언론들은 대부분 이라크나 북핵, FTA 등과 같은 현안이 어떻게 전개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화당과 네오콘의 패배로 귀착된 미 중간선거 결과가 세계 정치나 경제 현안의 변화에만 그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오콘과 결별한 부시가 집권 후반기에 어떤 변화를 보일지, 또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권을 잡을지에 따라 그 폭은 달라지겠지만 총체적인 변화가 대세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의 변화 중에는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21세기 디지털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질서도 분명 포함될 것 같습니다. 미국은 산업혁명의 최종 승리자이자 정보혁명의 건설자입니다. 미국이 산업혁명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적 요인도 한몫 했습니다. 하지만 정보혁명은 다릅니다. 정보고속도로 건설과 시스템 혁신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오히려 외부의 공산 세계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디지털 세계 질서의 창조주라 자처합니다.
민주당은 정보고속도로를 기획하고 건설한 주역입니다. 부시와 공화당의 힘의 외교도 디지털 부국, 초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민주당이 미국의 심장부에 재진입했으니 디지털 세계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우리에겐 북핵도, FTA도 발등의 불이지만 세계를 도도히 관통하면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멘털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일도 결코 게을리할 수 없게 됐습니다.
우리에게 디지털 세계의 지각을 뒤흔들지도 모를 미국 심장부 밑바닥의 변화를 감지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네오콘을 대신해 디지털 세계의 질서를 주무를 새로운 세력이나 싱크탱크가 어디에 있는지, 이들의 구상이 무엇인지 깜깜합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정보고속도로 건설 주역인 엘 고어가 환경운동가로 변신했고, 힐러리 민주당 상원의원이 남편 클린턴의 바톤을 이어받아 차기 대권을 쥘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디지털 세계 전도사들이 부르짖어온 ‘정보화 혁명’이니 ‘제3의 혁명’이니 ‘지식의 지배’니 하는 복음 정도를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미디어 빅뱅’ ‘인터넷 자본주의 혁명’ ’부의 미래’ 같은 경전을 접하는 순간 어지럽고 갈피조차 잡기 힘듭니다. 디지털 세상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 그곳이 과연 도솔천인지 실락원인지, 사바 중생들이 무릉도원에 이르는 십계명은 무엇인지 궁금증만 산더미처럼 쌓일 뿐입니다.
우리는 디지털 강국, IT 코리아라고 자부하지만 가진 것은 손오공의 변신 재주와 근두운(筋斗雲)이 고작입니다. 디지털 경제를 주무르는 금융도, 디지털 세상의 윤활유인 통·방융합도, 디지털 이상향을 설계할 지식의 보고도 변변치 않습니다. 오늘의 주역들은 산업시대의 유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일의 세대는 평준화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립니다. 중세 스페인은 이슬람 지식의 보고였던 톨레도를 탈환했으면서도 이를 외면하는 바람에 유럽 르네상스의 사각지대가 돼버렸습니다. 무적함대와 함께 바다 밑으로 영영 가라앉아버렸습니다.
이대로라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부처님이 손바닥으로 어떤 세상을 빚어낼지도 모른 채 날뛰는 손오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디지털 신세계를 준비해야 할 이 나라의 지도자들-정치인·관료·학자-은 구 질서의 평온함과 잇속을 지키기에만 열중합니다. 제발, 다시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뼈저린 회환의 눈물로 통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100여년 전의 ‘시일야방성대곡’이 되풀이돼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