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대기업 곳간은 차고 넘친다는데…

 150조원. 새해 예산이 아니다. 국내 10대 그룹이 곳간에 쌓아놓은 현금이다. 삼성그룹만 해도 60조원에 육박한다. 자본금과 비교했더니 엄청난 액수다. 현금 유보율이 무려 1300%다. 자본금의 열세 배나 현금을 보유한 셈이다. 일반 제조업체도 마찬가지다. 자본금의 여섯 배에 이르는 현금을 보유한 것으로 집계됐다.

 기업 재무구조가 이렇게 탄탄한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IMF 사태에서 벗어난 지 몇 해가 지났다고 재무 건전성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나. 그저 놀랍기만 하다. 현금이 많으면 당연히 좋다. 그걸로 투자도 하고, 빚도 갚는다. 주주에게도 배당해야 한다.

 그런데도 해당 대기업은 마냥 기뻐하는 것만은 아닌 눈치다. 현금을 확보한 목표가 재무 건전성 향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 어떻게든 투자하고 싶은데 마땅히 쓸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재워뒀다. 생업 현장에서는 불황에 허덕이고, 한쪽에선 넘쳐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반도체나 액정표시장치(LCD)와 같이 미래 시장이 당장 보이는 분야에서는 설비 투자가 활발하다. 그런데 들여다 보면 꼭 필요한 투자만 집행한다. 과거와 같이 거침없는 투자는 아니다.

 통신사업자들을 보자. 내수 투자의 핵심 기업들이다. 7대 기간통신사업자가 내년 투자를 올해에 비해 10% 줄였다. 올해 투자 규모도 목표치에 5000억원 이상 모자랄 전망이다.

 설비든, 연구개발(R&D)이든, 인수합병(M&A)이든, 신규 사업이든 투자처가 이렇게도 없을까. “과거에는 정부가 투자를 독려하기도 하고 우리도 미래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게 투자할 만한 사업도 없습니다.” 재계 관계자들의 대답이다.

 IT839 정책만 해도 약발이 다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정부가 채근하지 않아도 기업들은 돈이 보인다면 투자한다.

 “투자할 데가 정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한번 해보려고 하면 정부 규제에 막히고, 돌아가려 하면 ‘문어발’이니 뭐니 하는 비난이 쏟아집니다.” 한 통신사업자 임원의 말이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 돈이 어디로 가는가. 부채를 갚을 수 있지만 대기업들은 거래 은행을 고려해 일부러 안 갚은 게 벌써 오래 전이다. 그러니 현금은 대부분 이월되거나 주주·직원에게 간다. 아니면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기도 한다. 주주 처지에선 배당금이 늘어나거나 주가가 오르니 당연히 좋다. 하지만 후방 산업계에 가야 할 돈마저 이렇게 도중에 사라진다면 참 문제다. 중소 디지털휴대이동방송(DMB) 기술 업체들은 경영난에 허덕이며 살 길도 잘 찾지 못하는 지경이다.

 시중에는 대기업들이 투자를 유보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는 말이 나돈다. 웬만한 투자를 내년 대선 이후로 늦춘다는 소문이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실탄을 재워놓았다가 1년 뒤에 쓰자는 것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사실이라면 큰일이다.

 투자는 타이밍이다. 적기 투자가 성공을 보장한다. 기업은 그래서 이모저모 시장과 산업계 변수를 따져가며 투자 시점을 저울질한다. 시장을 읽는 것보다 정치 상황을 읽는 게 더 확실한 투자 성공 비결이라는 얘기인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이다지 요원한가”라는 탄식은 대기업의 투자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후방산업계엔 너무 한가로운 얘기다.

 어떤 이유일지라도 대기업들이 곳간을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강제로 해서는 안 된다. 기업 스스로 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어떤 기업 투자 진작책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러한 고민 없이 나온 정책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대기업도 만의 하나 정치 변수를 염두에 뒀다면 그 생각을 하루빨리 접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대기업이 그렇게 줄기차게 외쳤던 ‘정치와 경제 논리의 분리’ 주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수 u미디어팀장@전자신문, hs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