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이었다. 소니가 S-LCD에 투자를 늘리겠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을 통해 일방적으로 밝혔다. S-LCD는 삼성전자와 합작사지만 열쇠는 삼성이 쥐고 있다. 그런데 삼성의 답변이 이상했다. ‘S-LCD의 8세대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다는 원론적인 자세,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는 것이다. 이틀 후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소니가 내년에 액정디스플레이(LCD) TV 출하량을 1000만대로 늘리겠다는 뉴스였다. 올해의 배 가까운 물량이다. 역시 보도원은 니혼게이자이였다. 그제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아하, 바로 이것이구나.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소니의 애드벌룬식 언론 홍보는 노골적인 구애구나. 이게 바로 소니의 속셈이구나.
지금부터 3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이상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내기 한번 합시다. 2006년께에는 40인치대 LCD TV가 가정의 거실에 보급되도록 할 겁니다.”
의외였다.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TV가 막 선보이던 때였다. LCD는 PDP에 비해 워낙 고가여서 모니터용으로만 쓰이고 있었다. 한국은 텃밭이던 모니터용 LCD 시장에서도 아성이 흔들고 있었다. 저가를 무기로 한 후발 대만 LCD업체의 추격이 드셌다. LCD의 수익성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한국이 대만에 역전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LCD가 모니터에 채택되기까지 10년 이상 걸리지 않았나요? TV로 대중화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2006년까지는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내기합시다. 만약 2006년까지 40인치대 제품이 거실을 차지하지 않으면 제가 해당 제품을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이 사장은 모든 악조건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있어 했다.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내기에 지더라도 별다른 페널티가 없었다.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3년쯤 흐른 지금, 그예 삼성이 일을 내고 말았다. 삼성전자가 ‘보르도’를 LCD TV 세계 1위에 올려놓았다. 삼성은 지난 3분기에 전 세계 LCD TV 시장에서 대수 기준으로 13.2%를 차지했다. LCD TV의 선두 주자였던 일본의 샤프마저 1%포인트 가까운 차로 제쳤다. 더 놀라운 점은 대수보다 매출 기준에서 삼성의 점유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 매출로는 15.6%의 점유율이다. 경쟁사보다 값을 더 받았다. ‘보르도’가 세계 최고의 명품TV로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삼성의 30여년 TV 역사상 처음이다.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3년 전 이상완 사장이 보여주었던, 상식을 뛰어넘은 자신감이 이제서야 이해된다. 세계 TV시장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킨 멘털은 LCD다. ‘보르도의 기적’이 삼성 TV사업부의 공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막강한 LCD사업부의 지원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지난 30년간 TV황제로 군림해온 소니는 삼성과 샤프는 물론이고 필립스에마저 뒤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바다가 뽕밭이 되고 뽕밭이 바다가 됐다. 소니가 독자 기술을 내세우며 LCD를 등한한 결과다.
기쁨도 잠시, 걱정이 앞선다. 한국의 LCD가 진면목을 보이기까지 기나긴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20년의 세월 만이 아니다. 기업은 사운을 건 모험을 수없이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와 LCD를 이어갈 뚜렷한 주자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과거 반도체나 LCD에서처럼 사운을 건 기업의 투자는 더더욱 없다. 멘털이 움직이고 있는 한 뽕밭은 다시 바다로 가라앉을 수 있다. 바다 또한 언제가는 뽕밭으로 치솟을 수 있다. 상전벽해의 짜릿함에 젖어있기보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지혜를 배울 때다.
유성호 디지털산업팀장@전자신문, sh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