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통방융합 거꾸로 읽기

정부의 방송통신기구 설치법안에 대한 거부 사태가 심상치 않다. 방송위 노조와 야당의 반대에 이어 통합당사자인 방송위원회까지 직원 신분보장이라는 덯에 걸려 정부안을 거부하고 나섰으니 정부 체면부터 말이 아니게 됐다. 정부안 거부 사태는 분위기에 따라서는 시민·언론단체관 등 이해집단을 통해 줄줄이 이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11일 ‘방송통신위원회의 설립법안 공청회’에서도 패널들은 ‘방송의 독립성’이니, `정치적 중립성`을 들어 정부안을 공격하는 풍경이 벌어졌다. 정부안이 이렇게 흔들리면 통방융합 논의는 또다시 무기한 안개 속으로 묻힐 수 밖에 없다.

모처럼 기대에 부풀었던 산업계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마찬가지다. 7∼8년씩 거듭돼온 통방융합 논의의 판이 깨질 수도 있다는 아찔한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판이 깨지면 반길 이는 미국이나 일본, EU와 같은 IT 경쟁국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거부하는 측의 논리가 ‘방송장악 음모’니 ‘정치적 독립성 훼손’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니 이 또한 답답할 지경이다. 막말로 대통령 선거는 5년마다 돌아오지만 세계시장에서 한번 넘겨준 통방융합 주도권을 되찾아 오기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맨 처음 정부안을 공격한 방송위 노조에게 첫번째 혐의가 있을까. 하지만 노조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가 분명하고 직원들이 ‘기득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인데 노조는 가만 있으란 말인가? 더구나 노조는 민간인이던 직원신분이 일반직 공무원으로 바뀌면 사실상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리는 게 아닌가?

한나라당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야당이란 어디까지나 야당인 법이다. 통합기구의 위원 임명권을 모두 대통령이 가져가겠다는데 가만 있을 야당이 있을까. 게다가 내년은 건곤일척, 대선이 치러지는 해다. ‘현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니 하는 말들은 애교 수준으로 들어줄 만하지 않은가!

말을 바꾼 방송위에 책임을 돌리는 것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방송위는 ‘감히’ 정부안을 거부했다는 괘씸죄밖에 없다. 거부할 이유가 있으면 대통령의 지시도 거부하는 게 요즘 관행이다. 아무리 비난이 쏟아진다고 해도 통방융합이라는 대의에 동참하라며 수백여 직원들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넘어가려니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야당의 수용불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노조와 방송위가 정부안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었을까. 백번 양보해도 그건 아니다. 정부안에는 잠복해 있던 폭발성 강한 이슈가 몇개 더 있다. 나중에 법안이 통과할 즈음이면 문화부와 산자부가 제기할 산업 진흥업무 영역 소관 문제다. 문화부는 콘텐츠를, 산자부는 통방산업 진흥업무를 가져가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런 물밑 경쟁은 드러나지만 않았을뿐 해당 부처에서는 이미 부처의 존폐를 가름할 사안으로 부각된 상황이다. 그렇다고 산업진흥 업무를 유관부처에 분산시키면 이 또한 본래 통합기구 출범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수 없다.

정부안은 결국 통합 성과에만 급급한 나머지, 이해당사자들이 공격하면 언제든지 뚫릴 취약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다. 이번 거부 사태는 다만 부차적 이슈가 먼저 돌출됐을 뿐이다. 이쯤 되면 진퇴양난이다. 밀어붙이자고 할 수도, 그렇다고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애당초 실체가 없던 정부안을 어떻게 하루라도 빨리 채워가느냐로 모일 수 밖에 없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대화 상대를 설득하는 일은 정부 측의 지혜고 역량이다.

◆서현진 부국장대우·정책팀장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