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얘기다. 이윤우 삼성전자 당시 반도체총괄 사장은 미국 글로벌 IT기업 CEO 모임에 참석했다. 인텔·IBM·HP 등 세계 IT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기업의 CEO들이 연초마다 모여 시장 흐름과 경영 전략 방향을 놓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비공개다. ‘그들만의 리그’에 삼성전자가 처음 초청받았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위상을 세계 IT기업들이 공인한 셈이다.
몇년이 흘렀다. 그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반도체·디스플레이는 물론이고 휴대폰·TV 등 완제품에서 삼성전자의 파워는 더욱 커졌다. 이달 초 미국에서 열린 CES에도 확인됐다. 특출난 신제품을 내놓아서가 아니다. 구글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는 발표 하나였다. 현지 미디어도 들썩였다. IT 하드웨어의 절대 강자인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뉴스메이커인 구글과 손을 잡았으니 ‘뉴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한 조명을 받는 자리에 삼성전자 CEO는 없었다. 이기태 당시 정보통신총괄 사장이든, 최지성 당시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이든 그들의 입을 통해 구글과의 제휴를 밝혔다면 어떠했을까. 글로벌 CEO를 만들 기회를 그냥 버린 셈이니 아쉽다.
우리는 세계 주요 IT 하드웨어 산업에서 절대 강국이다. 메모리반도체와 디스플레이가 그렇고 디지털 가전과 휴대폰이 그렇다. 이 분야에서 일본과 유럽을 앞질렀다. 아직 중국이 넘보지 못한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삼성과 LG의 CEO들이 “올해 세계 시장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CEO가 전면에 나서면 기업 브랜드도 더욱 높아진다. 글로벌 CEO를 빨리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우리 CEO들은 말을 아낀다. 겸손해서일까. 실속만 차리면 된다는 걸까. 우리 CEO들을 만날 때마다 그 이유를 물어봤다. 돌아온 답은 CEO마다 달랐지만 공통적인 게 있었다. “그러고 싶지만 아직은···.”
그들이 차마 잇지 못한 말이 뭘까. 이들은 ‘월급쟁이 CEO’ 얘기를 하고 있다. ‘오너’가 있는데 너무 튀면 이런저런 견제를 받기 쉬운 우리 기업 구조 말이다. CEO들은 이런 걱정에 불가피한 때가 아니면 공개적인 자리에 나서길 꺼린다. 해외에서는 한번이라도 만나보려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거래처나 기자가 줄을 서는 우리 대기업 CEO의 현주소다. 국내에도 이들과 인터뷰를 하려면 기사를 안 쓰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해야 할 정도다.
이들이 대외 활동을 꺼리는 사이, 우리에 비해 세계시장 영향력이 한참 떨어지는 유럽이나 아시아 기업의 CEO의 발언이 세계 유수 언론을 탄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대만의 반도체 업체가 전망하고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식이다.
우리 기업 구조에서 글로벌 CEO가 나오려면 오너부터 앞장서야 한다. 다행히 조짐이 보인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전무는 최근 삼성전자 조직 개편에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직함은 최고고객책임자(CCO)다. 고객, 특히 글로벌 고객의 눈으로 경영전략을 짜고, 내부 부문을 조정하는 역할이다. 아무래도 글로벌 기업의 CEO와 만날 자리가 많다. 글로벌 CEO로 성장할 수 있는 이재용 전무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경영 수업 자리다.
SK의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은 이번주 다보스포럼에 참석한다. 글로벌 CEO가 대거 모이는 자리다. 글로벌 통신 사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두 형제는 다보스포럼을 통해 글로벌 CEO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오너가 앞장서면 전문 경영인들도 뒤를 따를 수 있다. 물론 오너가 나서면 전문 CEO의 입지가 낮아질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CEO가 오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거의 없다시피한 글로벌 CEO를 이제는 우리도 배출할 때가 왔으며 이제 그 첫발을 뗐다는 게 중요하다.
◆신화수 u미디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