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0년이 진짜 더 걱정이다.”
오랜만에 입을 연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 말은 ‘부자 몸조심’에서 나오는 괜한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처럼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우리나라의 몰골을 내다본 그의 직관력에서 나온 솔직한 우려로 들린다.
이 회장의 말이 엄살이 아니라 ‘팩트(fact)’라는 정황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먼저 거시경제지표가 그렇다. 최대 수출국인 중국에 대한 무역흑자가 5년 만에 처음 감소로 돌아섰고 대일 무역적자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체감되는 샌드위치 압박은 더하다. 중국의 기술은 이제 우리 코앞까지 올라왔다. 그저 짝퉁이나 만들어내고 여전히 마무리기술이 부족한 기억 속의 중국이 아니다. 일부 분야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선진국과 손잡고 세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행보는 등골을 더 오싹하게 한다. 마쓰시타의 오쓰보 후미오 총수는 올 초 행해진 연두기자회견에서 “더는 한국기업의 독주를 볼 수 없다. D램과 같은 실패 사례를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삼성을 대놓고 겨냥한 선전포고를 했다. 샤프의 마치다 가쓰히코 총수는 더하다. 거의 막말에 가까운 표현을 써가며 노골적인 반한 감정을 드러냈다. “LCD를 밑지고 팔겠다. 한 6개월 해보면 과연 누가 손을 드나 보자.” 비즈니스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다. 설마 일본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만의 하나 어긋난 결과를 상정하면 정말 두렵다. 일본이야 마쓰시타·샤프가 깨져도 그 뒤에 도시바·NEC·소니 등이 즐비하지만 우리는 없다. 삼성·LG 가 깨지면 우리나라 IT산업은 끝이다. 이 회장의 걱정은 어쩌면 이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따지고 보면 한·중·일 3국 가운데 가장 유리한 입지는 우리나라다. 기술이 앞선 일본과 시장잠재력이 엄청난 중국과 이웃해 있다는 게 결코 위협 요인만은 아니다. 오히려 하기에 따라서는 기회가 될 소지가 많다. 정서적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이 두 나라와 얼마든지 동반자적 입장을 견지하며 시장파이를 키울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은 아직도 서로 껄끄러운 상대다. 그들로선 오히려 한국이 편한 상대다. 그걸 비즈니스적으로 활용 못한 건 우리의 책임이다.
경쟁자를 적으로만 보는 우리의 고질적인 소아병이 가져온 결과다. 얼마 전 다국적 기업 임원에게서 들은 얘기다. 한 국내 대기업 임원이 해외 특정업체와 특허침해에 따른 굴욕협상 후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면서 국내 경쟁사에는 자기 회사보다 꼭 더 받으라고 당부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물론 협상 결과에 따라 상사에게 경쟁사보다 네고를 못했다는 이유로 질책을 들을까봐 나온 행동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뿌리 깊게 박힌 ‘경쟁자는 적이다’라는 단선적인 사고가 가져온 결과로 보인다.
단선적 사고로 인한 폐해는 해외가 더 심각하다. 한·중·일 간 역학적인 유리한 입장에서도 잠재적 우군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보듯 한국기업이 주변국의 두려움의 대상이 돼서는 절대로 파이를 키울 수 없다. 우군이 없는 독불장군식 영업은 글로벌 시대엔 불가능하다. 아무리 우리가 신기술을 먼저 개발해도 시장 장악의 필수적인 표준 선점에 주변국이 동참해주지 않으면 허사다. 주변국들이 두려운 눈으로 우리 기업을 봐서는 민족적 자긍감을 만족시키는 카타르시스 효과만 있을 뿐이지 경제적으로 좋을 것이 없다. 중국·일본과 대만의 결속이 두드러지는 LCD의 사례에서 보듯 상대방의 공동전선만 가져올 뿐이다.
경쟁자도 필요에 따라 동반자로 만들 수 있는 ‘강하면서도 편한 기업’이어야 한다. 그것만이 무한경쟁이 판치는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성장이 가능한 회사를 만드는 길이다.
김경묵 편집국 부국장@전자신문, k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