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하이닉스 오디세이

 하이닉스반도체가 걸어온 길은 현대판 오디세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대서사시 같다. ‘하이닉스 오디세이’는 전설적인 대문호 호메로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화와 반전이 거듭된다. 출생부터 지금까지 줄곧 숱한 고난과 역경, 실패와 성공, 슬픔과 기쁨을 거듭하며 영웅적인 길을 걸어왔다. 불도저의 현대가 머리카락보다 섬세한 반도체사업을 한다는 소식에 대중은 경멸 섞인 놀라움을 표했다. ‘코끼리 바늘구멍 지나기’라며 요즘 말로 악플이 쏟아졌다. 대중의 질시와 외면에 시달리면서도 대이변을 일으켰다. 거대한 LG반도체를 집어삼켰다. 전 세계 언론은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었다’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기쁨도 잠시였다. 예기치 못한 IMF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거저 준다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했다.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할 때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난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정몽헌 회장의 자살로 옛 주인마저 잡아먹었다는 손가락질을 견뎌야 했다. 그 참담한 시련 속에서도 허리띠를 졸라매며 재기했다. ‘수렁에서 건진 딸’ 정도가 아니라 ‘눈부신 백조’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러나 성공의 환희는 고통으로 변했다. 대중의 미움은 눈 녹듯 사라졌지만 지나친 사랑이 화근이었다. 이천과 청주의 팬들이 서로 사랑을 독차지하려다 패싸움까지 벌이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고통보다 더한 비탄이 이어졌다. 성공신화의 주역인 우의제 사장마저 용퇴를 결정했다 ‘하이닉스 오디세이’에서 우의제 체제의 종식과 신임 사장의 영입은 마지막 반전이다. 파란만장했던 대서사시가 어떤 피날레로 치달을지를 결정짓는 최후의 갈림길이다. 대중의 관심은 또 한 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 내로라하는 능력과 커리어 소유자들이 자신이야말로 성공적인 피날레로 이끌 수 있다며 다투고 있다. 주변에서는 가타부타 점치기에 호들갑이다. 칼자루를 쥔 채권단은 왜 남의 제사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느냐며 핀잔을 할 만도 하지만 여유로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골치 아픈 후보 검증에 십분 활용하자는 속셈인 듯하다. 이미 여론을 통해 자격론에서부터 자질론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검증도 이루어졌다. 채권단은 이제 칼집에서 칼만 빼면 된다. 하지만 마지막 골치 아픈 숙제가 여전히 남았다. 자격론과 자질론 중 어느쪽에 판단의 무게를 두느냐 하는 점이 그것이다.

 여론의 분위기는 일단 자격론에 무게가 실리는 형국이다. 반도체사업이 고도의 기술을 요하고 막대한 투자가 소요되며 복잡한 통상문제·특허문제가 시시때때로 불거진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하는 채권단으로서는 국제적인 거대 M&A를 성사시킬 수 있는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격론이 대세지만 자질론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다르다. 강력한 오너십도, 철저한 관리기술도, 막강한 자금력도 없다. 직원들의 단단한 결속력만이 유일한 무기다. 하이닉스 성공의 열쇠도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필코 재기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였다. 반도체 문외한이었던 우의제 사장의 성공신화가 단적인 예다.

 하이닉스의 명운이 달린 결정을 앞둔 채권단은 한 번쯤이라도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서두칠씨의 회고록을 읽어보기 바란다. 서두칠씨는 퇴출1호로 지목됐던 한국전기초자에 취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주주를 섬기러 왔습니다. 우리 회사의 사원들을 섬기러 왔습니다. 우리 제품을 사주는 고객을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벌어서 세금을 많이 냄으로써 국가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그는 모래알 같았던 한국전기초자에 신뢰와 비전을 심었고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성공에 눈이 먼 주주들이 무리한 욕심을 부리자 그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난 후 투명하고 단단했던 한국전기초자의 유리는 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성호 디지털산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