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I사 P 사장. 대기업도 중도에 내팽개쳤던 설계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리느라 한때 쌓인 부채만도 22억원에 달했던 회사의 대표다. 자기 전 재산은 물론이고 친인척의 돈까지 차입했던 터라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파산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악전고투 끝에 2005년부터 매출이 늘면서 한숨 돌린 그는 “이젠 해외시장 진출도 했고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있는만큼 기대감이 높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연내 부채를 모두 갚게 될 것을 생각하는 P 사장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하다.
#2. 2차원 바코드 리더를 생산하는 A사 L 사장. 창업 후 2년간 매출이 거의 없이 투자금만 까먹었다. 생산제품이 장애인의 재활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돈을 벌겠다’가 목적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수요처가 한정돼 있다보니 잘 팔리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해외 전시회에 꾸준히 참석하고 관공서에 발품을 판 결과 조금씩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올해에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일명 구로디지털밸리)로 이전한 후 가장 많은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3. 95년 대구에서 창업한 N사의 H 사장. 그는 사업 2년 만에 직원들의 월급을 3개월치나 못 줄 정도로 어려움에 부딪혔다. 문을 닫게 되면 개인적으로라도 돈을 마련해 꼭 주겠노라고 설득했다. 결국 10여명의 직원들이 버텨주었고 1차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가 싶었는데 제때 투자를 못해 99년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입성, 다시 사업을 벌이다 경비절감을 위해 구로디지털밸리에 터전을 잡았다. “이전 경험이 새 컨버전스 서비스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며 각오가 대단하다.
위에 소개한 세 사람은 시련을 딛고 부활의 날갯짓을 하려는 구로디지털밸리 소재 벤처기업 CEO들이다. 새로운 희망 찾기에 나선 이들의 행보가 공교롭게도 이들이 똬리를 튼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의 ‘궤적’과 비슷해 보여 이채롭다.
한때 구로공단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잊히는 듯 했다. 이들 CEO 역시 무대의 주인공에서 엑스트라로 추락하는 인생의 쓴맛을 봤다. 그러나 ‘굴뚝’과 ‘여공’으로 대변되던 제조업 중심의 이미지를 벗고 구로디지털밸리가 벤처 지형도를 바꿔가듯 이들도 실패와 좌절을 교훈삼아 진정한 ‘코리안 드림’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64년 한국 첫 국가 공단으로 지정된 ‘구로공단’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를 이뤘다. 섬유·봉제 입주업체가 80% 이상이었고 이들이 전체 수출액의 44%를 차지했다. 70년대 가발산업에 이어 후반에는 전자업체가 속속 입주하기 시작했다. 수출 중추기지로서 힘을 잃으면서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어려운 시기를 거친다. 이후 IMF라는 높은 파고를 견뎌냈고 90년대 후반 정부의 벤처 육성책이 본격 시행되면서 IT기업 집산지로 거듭났다.
벤처 기업인들은 어떠했나. 코스닥 열풍에 휩싸여 수백억원대 주식부자가 쏟아졌고 ‘황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흥청망청할 때도 있었다. 벤처는 최고의 선이요, 희망이었다. 그러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그야말로 휑했다. 빈털터리 투자자를 양산했고 산업 기반은 송두리째 뽑혔다.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하는 벤처 1세대도 있지만 대부분 잊혀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차츰 옥석이 가려졌고 자정노력이 더해지면서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됐다.
둘 다 ‘부침’이 절묘하게 닮았다. 잘나갔다가 지난한 과거를 뒤로 한 채 이젠 자리 잡아가는 모습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다. 산업의 동력은 잘 갖춰진 인프라와 사람에서 나온다.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육성책은 큰 힘이 되면서 벤처 기업인들은 의욕이 넘친다. 테헤란밸리를 압도하며 한국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구로디지털밸리. 이곳은 이제 가히 벤처 블랙홀이라 할 만하다. 주변 환경도 개선되면서 시너지 효과도 커지고 좌절의 쓴맛을 본 벤처 기업인들도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목숨’ 내놓고 일한다. 그곳에서 그들의 희망이 움트고 있다.
◆임지수 온라인/탐사기획팀장 js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