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설치된 IBM 전자계산기가 24일 낮 12시 30분부터 가동됐었다. 1초동안 6만자나 읽는다.” (67년 당시 보도자료)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인 1967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이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의 ‘IBM 1401’ 가동 순간을 숨죽여 지켜본다. 그 IBM 1401이 국내 컴퓨터 도입 1호(통관날짜 기준)다. 컴퓨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던 한국IBM이 오는 25일 설립 40주년을 맞는다. 국내 컴퓨터 1호가 IBM 제품이라는 사실이 상징하듯 한국IBM 40주년은 곧 한국 정보기술(IT)의 40년과 호흡을 같이 한다. 이휘성 한국IBM 사장은 “한국IBM은 선진 기업을 벤치마킹하고 모방했던 초기 20년, 그 후 전 세계도 깜짝 놀랄만큼 고속성장했던 20년을 보냈다”면서 “이제 한국IBM 설립 40주년을 맞아 중국, 인도의 부상 속에서 한국IBM의 역할은 무엇인지 완전히 새롭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말했다.
◇IT산업 싹을 틔우다=한국 정부가 IBM 1401이라는 전자계산기를 도입함에 따라 1967년 4월 25일 옛 반도호텔에 IBM코리아가 설립됐다. 외국계 컴퓨터 업체의 첫 진출이었다.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지금의 재정경제부)은 천공카드시스템(PCS) 대신 진공관 컴퓨터 ‘IBM 1401’로 인구통계 조사에 나섰다. 그 후 한국IBM은 국내 전산 관련 최초 타이틀을 잇따라 만들어 나갔다.
69년 LG그룹이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의 단행한 전산화 프로젝트, 74년 연합철강의 국내 최초 생산관리 온라인화 프로젝트에도 IBM의 컴퓨터가 공급됐다.
대한항공이 온라인 국제 항공예약시스템 구축으로 민항기 전성시대를 예약할 때, 국민은행이 최초 예금 온라인 시스템을 가동할 때에도 전 세계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IBM 컴퓨터 ‘시스템 370’이 활용됐다.
당시를 회고하는 IT인들은 이 때문에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 IT역사를 한국IBM의 40년사와 함께 조명해보는 것은 흥미롭다”고 말한다.
◇코리아 수출 신화를 함께 쓰다=8·90년대 한국IBM은 매출 고속성장을 이루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수출 신화에도 기여했다.
81년 영업부 산하 한글개발부를 설치해 한글화 제품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토착 기업화하는 한편, 82년 한국IBM에는 수출전담부서인 국제 구매사무소가 국내 최초로 설립돼 국제화를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십수년 이상 한국IBM은 매년 수출 실적을 경신했다. 지금은 IBM의 글로벌 소싱 전략으로 한국IBM 내 전담부서는 없어졌다.
83년 1000만달러, 84년 2000만달러, 87년 5000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해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회사로 탈바꿈한다.
수출액은 93년까지 계속 증가해 5억 수출탑도 수상했다. 이즈음 ‘삼성전자, IBM 모니터 수출 100만 돌파’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국내 IT산업이 본격적인 중흥기로 돌입했음을 한국IBM 수출 기록으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IBM의 토착화와 국제화의 결정판은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린 88년 서울올림픽이다. 한국IBM은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을 후원해 성공적인 대회 진행을 도왔다. 당시 올림픽조직위원회는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할 생각이었으나, 국내의 ‘두뇌’들이 모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이 자체 개발을 고집했다. 결국 KAIST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경기장 정보처리 시스템을 개발해냈고 국내 정보화를 촉발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한국IBM 광고 문구는 그래서 더욱 시사적이다. “올림픽 입장식에서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선수단은 컴퓨터와 전산인입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굳게 뭉쳐 경기운영시스템, 대회 관리 및 지원 시스템 설치, 운영을 위해 7년동안 땀흘려 일해 왔습니다.”
이후 91년 9대 사장으로 오창규 사장의 취임 이후 한국인 사장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IBM은 토착 기업의 면모를 완성하게 됐다.
98년 한국IBM은 인터넷 세상을 예견한 ‘e비즈니스’라는 유명한 마케팅 캠페인을 실시했다. 90년대 초 위기의 IBM을 회생시킨 주역으로 유명한 주인공인 루 거스너 회장도 98년 방한해 대한항공, 동국제강의 IT아웃소싱 계약 체결을 이끌어냄으로써 국내 IT서비스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다.
◇정보기술 파트너에서 혁신 파트너로=2004년 한국IBM은 ‘IBM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UCL)’을 개소했다. 정보통신부와 협력 관계로 탄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크다. 한국의 우수한 IT기술을 통해 IBM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IBM UCL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핵심 분야인 텔레매틱스와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기술을 집중 연구·개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연구소 개소는 한국IBM 스스로 정보기술 파트너에서 기업 혁신 파트너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겠다는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IBM은 지난 12일에도 국내 기업들이 IBM의 최신 기술과 솔루션을 활용해 혁신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한국소프트웨어솔루션센터’를 설립했다. 현대사회에서 비즈니스는 물론 정부 및 생활 기능까지 IT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한 한국IBM은 “이제 IBM은 혁신을 통한 가치 창출 해법을 제공하는 것을 핵심 역량으로 삼는다”고 공표했다.
물론 40년사에 뼈아픈 악재도 있었다. 이른바 ‘IBM 사태’로 불리는 납품 비리 사건이 불거진 것. 2004년 일시적으로 경영 실적이 악화되기도 했지만, 지금 한국IBM은 대대적인 비즈니스 관행 개선으로 가장 청렴한 다국적 기업으로 거듭났고 매출도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혁신의 파트너로 새롭게 비상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이휘성 한국IBM 사장
“IBM은 사회의 혁신까지도 감히 꿈꿔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장이 아닌가 합니다.”
오는 25일 한국IBM 설립 40주년을 맞이한 소감을 묻자, 이휘성 한국IBM 사장은 주마등처럼 지난 일이 스치는 듯 생각에 잠기는듯 하다가 이 한마디를 꺼냈다.
“한국IBM은 67년 대형 컴퓨터로 우리나라의 IT시대를 연 이래, 금융 온라인 시스템 구축, 사무자동화 시스템 도입, e비즈니스와 온디맨드 컴퓨팅으로 한국 사회와 기업의 혁신을 지원하는 ‘혁신’ 파트너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이 사장은 한국IBM이 막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85년, 시스템엔지니어로 입사한 후 2004년에 12대 한국IBM 사장이 됐다.
“직장이 옮기는 일이 흔한 시대라서 20년 넘게 한 직장에 다니는 게 오히려 특이하지요?”라고 운을 뗀 이 사장은 “한국IBM 직원이라면 누구나 ‘고객의 성공을 위한 헌신’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신뢰와 책임’ ‘회사와 세상을 위한 혁신’이라는 3가지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이 사장의 얼굴에는 IBM 가치를 진정으로 추구하는 ‘마니아’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는 사내 모임과 외부 인터뷰 및 강의에서도 혁신을 강조해 온 ‘혁신 전도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장은 창립 40주년을 맞이해서 ‘글로벌’이라는 화두도 들고 나왔다.
그는 “어떤 기업이든 글로벌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비슷한 업종의 글로벌 기업에 안방도 내줘야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면서 “앞으로 무역 장벽이 없어지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직원들에게 세계가 인정하는 글로벌 기준에 맞춰 실적이나 성능을 달성한 뒤에 ‘가장 한국적인 것’을 내놓아야 빛을 발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력을 갖추지 않고 ‘한국적인 것’만 내세우면 그 진가는 퇴색되고 허튼 수로 실력 부족을 만회해보려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이 사장은 IBM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업 및 비즈니스 모델인 ‘글로벌 통합 기업(GIE:Globally Integrated Enterprise)’도 소개했다.
그는 “GIE란 현지법인을 두는 형태에서 벗어나, 전 세계 인력과 자원을 대상으로 유기적인 글로벌 분업과 아웃소싱을 통해 생산과 서비스의 글로벌 통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업 형태”라면서 “IBM은 여러 국가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이라기보다 전 세계를 자원과 인력, 영업까지도 통합한 글로벌 기업 혹은 글로벌 통합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IBM은 이제 단순한 IT기업에서 벗어나, 기업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한편, 글로벌 파트너로서 차별화된 가치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키워드로 보는 IBM
▲이노베이션·Innovation=IBM이 보는 혁신은 기술의 발명과 비즈니스 통찰력이 합쳐져서 나타나는 새로운 가치이자,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 현상이다. 제품·서비스·비즈니스 프로세스·비즈니스 모델·경영 및 문화·정책 및 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혁신 대상이다. 특히 IBM은 ‘상호 협업에 의한 이노베이션’을 강조한다. 앞으로 혁신이란 개인이나 기업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현실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비스사이언스·SSME(Service Sciences, Management, and Engineering)=서비스 산업의 본질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 산업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이루기 위해 과학·경영학·공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지식을 종합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한 신학문 분야. 한국IBM은 서강대와 손잡고 국내 최초의 서비스 사이언스 학위 과정을 개설, 2007년 3월 학기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IBM이 60년대 전 세계 대학에 컴퓨터사이언스라는 학문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 것처럼 서비스가 학문화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한국IBM은 밝혔다.
▲글로벌통합기업·GIE(Globally Integrated Enterprise)=한국IBM은 단순히 개발한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국제(International) 기업을 1세대, 목표 시장에 현지 법인들을 앞세운 다국적(multinational) 기업 모델이 2세대 기업이라면 GIE를 3세대 기업으로 본다. 유기적인 글로벌 분업과 아웃소싱을 통해 생산과 서비스를 모두 통합해 제공하는 것이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가장 전문성이 뛰어난 인력을 고용하고 성능이 뛰어난 자원을 사용한다. 올해부터 한국IBM의 글로벌테크놀러지서비스 부서는 중국인 상사와 인도 부하직원을 두게 됐다. IBM이 올초부터 중화권(중국·대만·홍콩), 인도, 동남아시아, 한국의 서비스 조직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었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 시대에서 지구촌 기업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잼=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인터넷을 통해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토론 방식. 온라인 잼은 2001년 IBM이 최초로 고안했다. IBM은 2003년 160여개국 32만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같은 방식의 ‘밸류 잼’이라는 온라인 토론회를 통해 IBM의 3대 가치를 제정하기도 했다.
▲온디맨드이노베이션서비스(ODIS)=IBM의 비즈니스 컨설팅 부서와 연구개발조직인 IBM연구소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 IBM 본사 과학자들과 컨설턴트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각 기업에 최적화한 혁신 솔루션을 제공한다. IBM은 지난 2003년 포스코에 ODIS 형태의 혁신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와 함께 한국IBM은 내부에 테크놀로지콜레버레이션솔루션즈(TCS)를 새롭게 발족하고 반도체,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등 순수 기술 영업에도 나섰다.
◆IBM이 배출한 경영 스타들
한국IBM을 수식하는 또 하나의 단어는 ‘IT업계 사관학교’. 지난 40년동안 국내 IT업계의 걸출한 CEO 스타를 많이 배출했다. 초창기 다국적 기업의 CEO 중에는 IBM 출신이라는 경력이 따라붙는 경우도 많았고 국내 토착 기업의 주요 경영진으로 영입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진대제 전 장관처럼 IBM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경영 및 학계 인력도 많다. 한국IBM은 72년 국내 과학자의 IBM 연구소 연수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KAIST 김깅찰 박사(72년)가 IBM 연구소 1호 연수원이었고, 85년부터는 2∼3명의 국내 과학자가 동시에 IBM 연구소에 파견되기도 했다.
현직에 근무하는 IBM 출신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국내 업체로 이직한 경우만 해도 신재철 LG CNS 사장, 변보경 코오롱아이넷 사장, 김익교 오토에버 사장, 홍순만 하나로텔레콤 부사장, 정태수 LG엔시스 사장, 서주석 이루넷 사장, 황연천 KT 부사장, 이강태 삼성테스코 부사장, 임규관 SKT 상무 등을 꼽을 수 있다.
다국적 기업에도 많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손영진 시스코 사장, 김태영 사이베이스 사장, 이수현 한국쓰리콤 사장, 한의녕 SAP코리아 사장, 조석일 데이타크래프트코리아 사장, 김형태 한국EXE 컨설팅 지사장, 손승희 시벨코리아 사장, 손형만 한국맥아피 사장 등이다.
벤처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이진환 다우데이타시스템 사장,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 송규헌 오픈베이스 사장 등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류현정기자@전자신문, dream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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