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선점, 그 이상의 즐거움

 흔히 나오는 드라마의 주제 중의 하나가 ‘역전’이다. 간단한 이분법식 상황설정으로 극적인 긴장과 분노를 유발한다. 선의에 선 사람들은 극 초·중반에 무지한 시련을 당한다. 결국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고 결론은 뻔한 화해와 용서다. 누구나 결론을 짐작한다. 그러나 케케묵은 상황설정이 아직도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결론은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 과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공식은 오랜 시간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기업에도 공식이 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는 최고 강한 기업이 자리하고 있고 하부에는 종속된 기업들이 늘어서 있다. 문어발식 경영이니, 피라미드형 구조니 하며 불합리를 얘기하지만 전혀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의 논리이고 기업의 공식인 것을 인위적인 힘으로 강제할 수 없다. 강자의 한마디가 법이 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도태된다. 기술에서, 자본에서 뒤지면 잡아 먹힌다. 잠시 한눈을 팔면 여지없이 뒤처지게 되고 후진기업이 되면 영락없는 종살이를 해야한다.

 기업의 공식에서 특히 부각되는 것이 ‘선점의 공식’이다. 선점은 곧바로 힘이 된다. 힘은 ‘표준’이라는 갑옷을 입고 산업을 지배한다. 이러한 예는 오랜 시간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인터넷 광풍이 불던 2000년 인터넷산업을 지배한 나라는 미국이다. 익스플로러와 넷스케이프는 미국 주도였다. 네트워크 장비 역시 미국이 싹쓸이했다. 한낮 벤처기업에 불과했던 시스코시스템스는 일약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됐다. 전 세계 네트워크 장비의 80% 이상을 차지한 거대 기업으로 ‘시스코=네트워크 표준’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스코의 네트워크 장비가 공식적인 표준이 된 것은 아니다. 단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선점’이 자연스레 사실상의 표준을 만들었다. ‘선점’에 실패한 나머지 네트워크 기업은 시스코가 먹다 남은 부스러기 시장에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다. ‘선점’의 우월적 지위를 향유한 대표적인 예이다. 분초를 다투는 IT에서의 표준은 곧 매출이고, 힘이고, 영향력이다.

 IT강국으로 한국을 얘기하지만 이렇다 하고 내놓을 만한 것은 없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휴대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단지 활용측면일 뿐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로열티 지급 금액이 계속 불어나는 구조다. ‘선점’에 실패하고 ‘활용’에 치우친 결과다. 얻은 것은 ‘테스트 베드’라는 실험실 역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와이브로의 3세대(3G) 표준 채택은 새로운 시장 선점에 대한 기회를 열어주었다. 3G뿐만 아니라 4G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온 지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 기술이 세계 표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표준이 될 만한 기술조차 만들어 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무선통신기술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우뚝 설 기회를 맞이했다. 100여년 만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선점이 표준을 주도한 예와 표준이 선점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거기서 거기’다. 통신기술의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곧 관련산업의 발전을 의미한다. 통신산업은 나무와 같아서 끊임없이 산소를 공급한다. 끊임없이 제공되는 산소를 통해 로열티를 벌어들이고 한국산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다. 선점의 효과를 무엇보다 크게 누릴 수 있는 분야다.

 워싱톤 인근 버지니아주. 그곳에서는 달리는 차안에서 인터넷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지구의 반대편 달리는 차안에서 토종 통신기술인 ‘와이브로’를 이용해 한국 드라마 ‘대조영’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기술의 영토를 정복한 선물이다. ‘선점’의 공식에 가장 부합한 순간일 것이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