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계에 ‘순수 기초과학의 봉기’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목적기초나 응용연구 투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대’받아온 물리·천문·수학 등 그야말로 ‘돈’과 거리가 먼 순수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들이 획기적인 투자 확대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그동안 받은 설움에 대한 ‘한풀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실상 과학기술계는 대학과 출연연으로 나뉘어 우주의 비밀 등을 밝히는 순수과학기술, 양자PC 개발 등 미션이 명확한 목적기초 및 원천기술, 상품화를 전제로 한 응용연구로 크게 세 부문에서 기술 개발을 진행해 왔다. 그동안 과학기술계의 순수 기초과학 분야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 정책은 기술 사업화가 더 ‘급한 불’이었고, 쥐꼬리만 한 예산 확보를 위해선 서로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이전투구를 펼쳐야만 했다. 이것이 순수기초과학계가 언제나 우선 순위에서 뒷전에 밀린 이유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TFT가 국내 R&D 체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들의 ‘반란’은 예고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TFT 상임 자문위원 9명 중 8명이 대학교수다. 목적기초 및 응용연구를 주로 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출신자는 단 한 명이었다. “5년 뒤 뭐할 건데?” “어떻게 먹고 살건데?”라고 출연연구기관에 물으면, 할 말을 못한다. 속사정 뻔히 알면서, 묻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머쓱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보따리 같은 단기 연구만 해온 탓이다.
올해 우리나라 R&D 투자 예산이 드디어 10조원을 넘는다. GDP 대비 3%에 가까운 액수다. 과기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6년 일반회계 예산 146조원 중 기초연구 투자 예산은 1조6271억원이다. 연구비 비중으로는 기초연구투자가 응용연구 22.7%보다 높은 23.1%다. 그러나 건물 건립이나 인건비 그리고 순수과학기술계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기초·원천기술(이른바 목적기초) 개발 예산을 제하고 나면 순수하게 투입되는 돈은 2000억원 남짓하다는 논리다.
지난해 말 대전에서 민동필 국제비즈니스벨트 TFT 팀장을 만났을 때, 그는 50여페이지가 넘는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순수 기초과학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기초·원천 연구의 예산 비율을 높여 달라고 목소리 높이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한꺼번에 지식경제부로의 이관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부 조직을 대부제로 통폐합하는 마당에 출연연을 그냥 놔둘 리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1000명을 기준으로 통폐합할 것이라느니, 시점이 총선 이후라느니 하는 식이다.
구조조정에 가까운 개편 모델은 일본의 산업기술총합연구소(AIST)인 것으로 알려졌다. 거대한 1개 연구관리기관 아래 수 십개 연구소를 모아 보자는 것이다. 인력 이동이 자유롭고 융합으로 가는 기술 트렌드에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이다.
이명박 정부의 순수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프로그램은 이미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순수 기초과학용 장비 구입만 2조원이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정된 예산에 다른 쪽이 늘면 반대쪽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순수 기초과학기술계가 출연연을 위시한 목적중심 기초 기술을 개발해온 쪽에 ‘이번에야 말로 양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배경이다.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