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 출범을 앞둔 요즘 세종대왕을 향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세종의 정치 일대기를 다룬 사극 ‘대왕 세종’이 방영되고 있으며 세종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국민이 한글을 비롯, 측우기·해시계·물시계 등 문화유산을 물려준 세종의 업적과 백성의 소중함을 알고 몸소 아꼈던 그의 정치철학을 칭송한다. 세종에 대한 이런 관심은 차기 정부에 거는 국민의 바람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훈민정음 어지 현대어 번역) 1446년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친히 그 반포의 뜻을 밝힌 이 어지(御旨)의 내용은 그가 추구하는 정치철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다. 당시 조선은 정치·경제·외교 등의 분야에서 초강대국 명나라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조선은 한자문화권에 속했다. 한자를 얼마나 잘 알고 쓰는지에 따라 일자리와 소득이 결정됐던 사회였다. 따라서 백성을 아꼈던 세종은 애써 한글을 만들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한자를 배워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한자 공교육’을 강화했어야 했다.
지나친 비약이자 억지 주장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주장을 지금 대통력직 인수위원회가 펼치고 있다. 인수위 측은 영어 수업 논란과 관련해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유독 그렇다. 영어를 잘해야 출세하고 잘산다. 하지만 이는 해외 조기유학과 어학연수 등으로 인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돈이 해마다 눈덩이처럼 커져 지난해 서비스수지 200억달러 적자를 기록한 우리의 현실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정보화지수 세계 3위인 IT강국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IT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글 덕분이다. 한글은 21세기 정보화시대의 가장 적합한 문자체계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한국어가 유엔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서 국제 공용어로 채택된 바 있다. 우리말의 세계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세계가 인정한 우리말이 있으니 영어를 덜 중요하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영어는 매우 중요하다. 글로벌 경쟁 시대의 인재가 갖춰야 할 필요충분조건 중 하나는 영어실력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을 통해 영어 사교육비가 줄어든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일반 서민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특목고는 고사하고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최소한 영어학원에라도 보내야 하는데 주머니 사정도 문제지만 너무 늦은 게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인수위는 정책 결정에 앞서 백성의 어려움부터 살폈던 세종의 정치철학과 한글 창제의 의미를 한번쯤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또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과 한국어를 세계적인 문자와 언어로 발전시키는 우리말 세계화 정책 마련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우리말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킨다면 숭례문을 지켜내지 못해 낙담하고 있는 국민에게 다소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김종윤<탐사보도팀장>@전자신문, jy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