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직후다. 시위와 최루탄으로 온통 시끄러웠던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깐뿐이었다. 다음달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노조 결성과 파업이 들불처럼 번졌다. 규모나 지역, 업종을 따지지 않고 발생한 노동쟁의만 10월 말까지 하루 평균 44건에 122만여명이 참여했다. 민주화 시위자들이 누볐던 거리를 노동자들이 점령했다. 이른바 ‘87 노동자대투쟁’이다. 그해 여름은 그렇게 뜨거웠다.
전두환 정권은 8월 말부터 불법 파업을 본격 진압했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과 구속이 이어졌다. 노조 집행부도 와해했다. 노동자대투쟁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조직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해 말까지 결성한 노조는 1300여개, 89년에는 7800여개로 늘었다. 정경유착했던 군사정권은 일시적으로 노동운동을 제압했지만 결국 더 큰 호랑이를 키웠다. 당시 정권과 기업들이 진압 대신에 대화로 슬기롭게 포용했다면 노사관계 정립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3저 호황을 발판으로 우리 경제도 더욱 발전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기업경영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노동의 경직성’도 한결 누그러졌을 것이다.
2008년 3월. 또 한번의 집단행동이 봇물처럼 터졌다. 이번에는 중소기업이다. 주물업계를 시작으로 레미콘, 아스콘, 플라스틱, 알루미늄 업계가 잇따라 공급과 생산을 중단하거나 이를 경고했다. 원자재가 상승을 납품 단가에 반영해 달라는 요구다. 중소기업인 이들은 주로 대기업에 납품한다. 이른바 ‘을’의 반란이다. ‘을’의 요구는 급상승한 원자재가격을 납품 가격에 반영해달라는 것. ‘갑’도 이해를 했지만 인상 폭이 높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을’은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누구의 주장이 옳으냐는 문제가 아니다.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협상으로 해결할 일을 극한 사태로 키운, 양측의 의사소통 단절이다. 기업의 생산 중단은 노동자로 치면 파업이다. 노사 임금 및 단체 협상이 아무리 격렬해도 의사소통 구조만 제대로 있으면 파업까지 가지 않는다.
납품 갈등은 일부 전통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업체와 부품 협력사는 물론이고 대형 포털과 중소 콘텐츠 업체와 같이 ‘갑-을’ 관계인 모든 산업계가 똑같이 당면한 문제다. ‘갑-을’ 관계를 영원히 없앨 수 없겠지만 일방적으로 ‘을’이 억눌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언젠가 폭발한다. 87년 여름이 그랬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원자재가 납품단가연동제’에 유보의 뜻을 밝혔다. 취지는 좋지만 법제화하거나 강제화하게 되면 정부가 민간의 가격 책정에 간섭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유다. 옳은 지적이기는 하나 이명박정부를 친대기업 정권으로 여기는 중소기업계의 오해를 더욱 부추길까 걱정스럽다. 이 때문이라도 ‘갑’이 나서야 한다. 신정부의 친대기업 정책을 기대한다면 말이다. 오랜 관행을 끊으니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가뜩이나 치열한 시장 경쟁에 당장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래도 참고 견디며 ‘을’과 동반자 관계를 제대로 정립해야 한다. 그러면 몇 년 뒤에는 이런 문제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 모두 ‘갑’과 ‘을’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풍토를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의 납품 중단 파동은 자칫 ‘2008년 중소기업대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게 두렵다.
신화수 부국장·디지털산업부장@전자신문, hs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