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은 새로 지은 강진 초당에 있었다. 1801년부터 1818년까지, 40세부터 57세까지 그의 유배지는 혹독했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1801년 2월 8일 체포된다. 형인 정약종은 처형됐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다산은 19일간 문초를 받은 뒤 2월 27일 경북 포항 장기로 귀양길을 떠나, 그해 11월 전남 강진으로 이배된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주막집 등 이곳저곳을 한동안 떠돌다 1808년 봄, 새로 지은 초당에 입주한다. 1801년 이후 스스로 자신의 가문을 폐족이라 부르며 유배생활을 한다.
다산이 쓴 편지글을 번역한 박석무 교수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아들과 형,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다산의 편지글이었다. 이 중 이종억 영암군수에게 쓴 편지는 오늘날 곱씹어 볼 만하다. 1818년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난 후 목민심서가 완성됐으니, 이 시기 이종억에게 쓴 편지는 역작 목민심서를 쓰게 된 동기가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령과 백성의 사이가 머니, 애달프도다 백성들이여! 아전이 신체를 부러뜨렸어도 수령이 불러 물으면 대답하기를 ‘나무하다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라고 한다. 재물을 아전에게 빼앗겨도 수령이 불러 물으면 말하기를 ‘빚이 있어 마땅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고 한다.”
‘폐족’ 정다산은 수령(목민관)인 이종억에게 ‘아전들은 그 직업을 세습하기 때문에, 그 일에는 길이 들고 익숙해져서 관장(官長) 거치기를 마치 여관 주인이 길손 대하듯 한다’고 아전들의 잘못을 질책한다. 다산은 아전들의 이런 잘못은 결국 수령의 잘못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수령이 된 자는 어려서 글짓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한담과 잡희를 일삼다가 하루아침에 부절을 차고 일산을 펴고서 부임하니, 이는 우연히 들른 나그네 같다”고 했다. 수령은 몰라서 문제고, 아전은 너무 알아서 문제다. 고생하는 것은 백성뿐이다.
“저들이 허리를 굽히고 숨가쁘게 뛰어다니면서 공손하게 하니 그들의 속을 모르는 자는 고개를 쳐들고 스스로 잘난체해 그들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지만, 어깨를 맞대고 땅에 엎드린 그들이 낮은 소리로 소곤거리는 것이 모두 관가를 기롱하며 비웃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전들의 태도가 이 정도면 끔찍하다. 200년 전 아전들의 문제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영암이라는 고을이 이 정도면 대궐은 어떠했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청와대에 입주했다. 다산은 1808년 봄날 다산초당에 입주했다. 이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로, ‘한나라 임금’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의 입주식에는 수만명 인파가 몰렸고, 기대를 걸었다. 그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로 일컬으며, 앞으로 실용적인 정책을 펼쳐 국민을 편안하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100일 만에 실용과는 거리가 먼 ‘민심 이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현 정부의 아전들은 ‘고소영, 강부자, S라인, 만사형통(萬事兄通)’ 소리를 들었다. 아전들이 백성을 섬기는 게 아니라, 백성을 지배하려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반면에 ‘폐족’인 다산은 조용히 초당에 입주했다. ‘초당’에 묻혀 살았지만, 그는 백성을 먹고살 만하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는 실용주의에 기반을 뒀다. 불과 200년 사이 비슷한 계절에 한 사람은 유배지 ‘초당’으로, 한 사람은 ‘청와대’로 잠자리를 옮겼다. 한 사람은 초당에서 ‘목민(牧民)’을 생각했고, 한 사람은 기와집에서 ‘고소영, 강부자’로 구성된 아전들만의 리그를 통해 ‘실용(實用)이 아닌 실용(失用)정부’를 꾸렸다. 2008년 기와집 내각이 비판받는 이유는 뻔하다.
김상룡 경제교육부 차장 sr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