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들은 두 가지 생각밖에 없는 것 같아요. 헐값에 사거나, 팔지 않겠다면 죽이거나….”
몇 년 전 국내 전자 대기업과 기술 매각을 논의했던 A 부품 벤처회사 B 사장이 했던 말이다. 대기업이 먼저 제의했다. “좋은 기술인데 우리에게 팔아라. 회사도 좋다”는 제안이다. 자금이 크게 부족했던 참이라 B 사장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인수 제안가가 터무니없었다. 처음엔 기술 가치를 잘 모르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속된 말로, 거저먹겠다는 의도였다. B 사장은 결국 거절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 대기업이 압력을 넣었는지 일부 외국 거래처들이 거래 중단의 뜻을 전해왔다. 화가 치밀어 오른 B 사장은 알고 지내던 대기업 고위인사에게 거세게 따졌다. 이후 거래 중단이 수그러들었지만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8년 6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하이닉스반도체가 실리콘화일이라는 벤처기업의 경영권을 사들였다. 하이닉스는 이전에도 이 회사에 지분 일부를 투자하고 공동 사업을 펼쳐왔지만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판단이다. 지분 인수가가 적정한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양사가 합의한 것이니 적정했으리라.
대기업의 벤처기업 인수는 우리나라에선 아주 드물다. 벤처기업가라기보다 사업가 기질이 다분해 회사 매각보다 상장을 바라는 우리 벤처기업가들의 특성도 작용했다. 하지만 벤처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가 더 큰 요인이다. 특히 힘이 센 대기업들이 이를 조장했다.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A사 사례와 같이 사업에 방해가 되거나 잠재 위협 세력이라고 판단하면 싹수를 자르려 했다.
M&A에 시큰둥했던 대기업들이 최근 적극적으로 돌아섰다. 나날이 융합화하는 추세를 신속히 편승하자면 새로 키우느니 경쟁력 있는 회사를 인수하는 게 훨씬 효과가 높다는 판단이다. 대기업 출자총액제한 규제 완화 등 정부 정책까지 맞물려 앞으로는 더 가속화할 전망이다.
대기업의 중소벤처 인수를 놓고 ‘문어발 확장’이니 ‘중소 업종 침해’니 비난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되레 벤처 생태계 형성에 긍정적이다. 벤처의 기본 속성은 M&A다. 벤처기업가는 기술이나 회사를 필요로 하는 기업에 팔면서 회사에 남아 일하든,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할 수 있다. 우리 벤처문화는 외국과 다소 달랐다. 인터넷 거품 시절, ‘상장이 곧 부(富)’로 연결되면서 벤처기업가들이 상장에만 집중했다. M&A 시장을 제대로 형성할 기회를 놓쳤다.
벤처 M&A가 활성화하면 덩달아 기술 평가도 고도화한다. 애써 개발한 기술을 제값받고 사고파는 시장이 열린다. 파는 벤처기업이나, 사는 대기업 모두 윈윈이다.
올해 산업계 최대 화두가 대·중소기업 상생이다. 대기업마다 합리적인 거래 관계를 정립하느라 애를 쓴다. 거래 정상화도 좋지만 M&A도 상생에 좋은 도구다. 단, 필요해 사는 기술이니 제값을 치러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오랜만에 B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뭔가 조언을 얻기 위해서다. “그거요? 으음. 할 얘기도 없는데. 다음에 만나 얘기하죠.” 수화기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특유의 활력은 온데간데없었다.
신화수 부국장 hsshin@etnews.co.kr